이미 성령의 역사로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추후 반복적으로 성령세례가 임하여 성령으로 충만해진다고 가르치는 오순절 신학이 성경적 근거로 주장하는 또 다른 내용은 사도행전 4장이다. 이미 성령을 받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간절하게 기도하였을 때, 또 다시 하늘로부터 성령강림이 일어났다고 한다. 바로 다음의 내용이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당시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지도자들로부터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능력을 구하자 하나님께서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기도의 응답을 주셨다. 제자들이 기도하던 장소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신자에게 반복적으로 성령이 임하신다고 가르치는 오순절 운동 신학자들은 바로 이 내용이 단회적이지 않고 반복적으로 성령세례가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자신들의 이론의 성경적 근거라고 한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사도행전 4장에서 같은 일을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경은 이때 제자들이 상태를 ‘성령이 충만하여’(행 4:31)라고 기술한다. 성경은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졌다고 하지만, 오순절 운동가들이 그 내용을 근거로 성령세례가 또 임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오순절 운동 신학의 성령충만의 이론이기 때문이다. 오순절 신학은 최초의 성령세례 이후 성령세례가 반복되면서 성령충만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래서 최초의 성령의 임하심을 ‘성령세례’라고 부르고, 그 이후의 성령의 임하심을 ‘성령의 충만’이라고 표현한다. 

대부분의 오순절 성령운동 추종자들은 오순절 신학 개념에 대해 잘 모르고, 무조건 성령의 역사를 추구하고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토레이 등을 비롯한 오순절 신학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 성령을 받는 사건을 ‘성령세례’라고 부르고, 그 이후 성령이 또 임하시는 현상을 ‘성령의 충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 4:31절이 초대교회 제자들의 영적상태를 ‘성령이 충만’이라고 표현하였을지라도 이날 성령이 또 임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개혁신학에서는 성령의 충만을 이미 오신 성령의 인격적이 다스림으로 이해하지만, 오순절 신학에서는 성령이 더 오시어 성령의 힘이 흘러 넘치게 됨을 성령의 충만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행 4장에서 땅이 흔들릴 정도로 강력하게 제자들을 위해 역사하셨다. 땅이 흔들렸다고 하므로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난 났다고 보기 쉽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성령이 하늘로부터의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함께 마치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모습으로 지상에 임하셨다. 그러나 사도행전 4장에서는 그런 현상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4장의 제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하심을 행 2장과 같은 성령의 지상강림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행 2장의 성령의 기사는 역사적으로 단 한번 뿐인 성령의 지상강림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후 2,000년 교회사 속에서 이런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 어떤 놀라운 성령의 부흥의 때에도 땅이 흔들릴 정도의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가장 뜨거운 성령의 부흥이었다고 평가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1차 대각성 때에도 땅이 흔들렸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사람들이 기절하고 울부짖는 염려스러운 일이 많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있으나, 땅이 흔들리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오순절 불건전 성령파들은 반복적으로 성령이 강림하실 때 땅이 흔들리는 역사가 나타날 수 있다는 맹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지역에서 불행한 지진사태가 나면 그것을 성령의 임하심과 연관시켜서 말하는 추태를 자주 보인다. 지진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장차 그 지역에 성령의 큰 부흥이 일어날 징조라는 한심한 소리를 하기도 한다. 수년 전 일본에서 처참한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운동에 물든 산당파 교인들은 조롱과 무시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도행전 4장의 성령의 역사를 이와 같이 성령의 추가적인 지상강림으로 해석하면서 오순절이 시대마다 개인들에게 반복적으로 성취된다고 하는 주장에 저명한 성령신학자 토저(A. W. Tozer)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토저도 사도행전 4장에서 나타난 제자들의 성령의 충만이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과 같은 일의 결과라고 보았다. 토저는 다음과 같이 같이 말했다.

“이때(행 4장) 모였던 사람들 중 일부는 오순절 사건 때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부어주심을 이미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오순절 사건 이후 다시 그들을 충만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뜻이 아니라면, 그 분은 자신의 뜻을 거슬러 행동하셨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사도행전 8장, 10장, 19장에서는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신 또 다른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최초의 오순절 사건이 일어나고 몇 년이 지난 후에 일어났다.”(A. W. Tozer)

토저는 이날 생애 최초로 성령의 세례를 경험한 사람도 있었겠으나, 대부분은 이미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날에 성령의 세례를 체험한 사람들이었다고 하였다. 최초의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고 몇 년 후에 또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토저는 행 2장의 성령의 부어주심이 4장, 8장, 10장, 19장에서 성령의 부어주심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고 하였다. 

그러면 로이드 존스는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고 가르쳤을까? 불행하게 로이드 존스도 토저처럼 사도행전 4장을 오순절 운동가들과 동일하게 해석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사도행전 4장에서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이 사도행전 2장에서 일어난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더욱 분명하게 가르쳤다.

“오순절 사건 이후부터 그들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은 (성령에 의한) 세례를 받았다. 같은 일이 사도행전 4장에서도 반복된다. 거기서 우리는 그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 진동하고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라니라’는 말씀을 보게 된다.”(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는 사도행전 4장에서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또 부어주신 것처럼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이 성령을 더 부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성령이 더 임하시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성령을 부어주심을 위해서 기도하기로 서약합시다. 스미턴의 말을 인용하여 여러분들에게 호소합니다. ‘특별한 기도 형식에 대해서는, 보편적인 각성이 있을 때는 언제나 신자들의 공동체가 마치 예수님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사이의 기간 중 초대 교회 신자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성령의 부으심을 기다렸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현재의 교회는 기다리고 기대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로이드 존스)

“플리머스 형제단이 취한 원리, 곧 성령은 오순절에 부어졌으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 부으심을 위하여 더 이상 기도할 필요성이나 정당한 근거가 없다는 주장보다 더욱 오도되고 왜곡된 이론은 없으며, 또한 이보다 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성령을 구하고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교회는 더 많은 것을 받습니다.”(로이드 존스)


구약의 절기들과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2장에서 일어난 성령강림이 사도행전 4장에서도 다시 재현되었다고 가르치는 로이드 존스 등의 성경해석의 허구성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는 오순절 명절의 무엇이었는지? 오순절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하신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에 대해서 연구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오순절이 시대마다 개인적으로 반복된다는 그릇된 이론 하에 전개되는 로이드 존스 등의 성령세례 사상이 얼마나 허구인지 드러나게 된다.

구약의 명절들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일들이 미리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무교절, 유월절, 초실절, 오순절 속에는 장차 일어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부활, 승천하신 후 보내실 성령에 대한 계시가 내포되어 있었다. 구약의 명절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중요한 일들을 살펴보면,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이 사동행전 4장에서 또 벌어졌다고 말하는 로이드 존스 등의 성경해석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 다 드러난다.

7일 동안 이어지는 무교절의 첫 날은 유월절이었다. 전체 7일 동안의 무교절 안에 유월절, 초실절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송들을 위해 피 흘리고 죽은 양을 기념하는 날이었다(출 12:1-2). 무고한 양이 죽으며 흘린 피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 문설주에 칠하여 장자의 생명을 거두시는 하나님의 재앙에서 예외가 되어 구원받았다. 장차 하나님 백성들을 위해 대신 죽으시는 속죄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계시하신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유월절 날에 잡히시어 그 다음 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며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 이제 어린양을 잡아 죽이는 유월절을 더 이상 지키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그 의미가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양을 잡는 유월절을 지킨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것은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엨수 그리스도의 피의 의미가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7일 동안의 무교절 기간에는 반드시 한 번의 안식일이 들어있었다. 지금 우리의 시간으로 목요일 해가 지면서 유월절이 시작되었는데, 예수님은 그 날 밤 유월절 만찬을 드시며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제정하시었다. 그리고 금요일 낮 오후 3시 경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구약의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금요일 오후 해가 지면서 시작되었고, 토요일 오후 해가 지면서 안식일은 종료되었다.

7일 동안의 무교절 속에는 반드시 한 번의 안식일이 있었고, 안식일이 지난 그 다음 날을 유대인들은 ‘초실절’이라는 명절로 지켰다. 훗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날이 구약에서는 초실절이었던 것이다. 초실절은 계절적으로 아직 여름이 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보리 추수를 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러나 먼저 무르익은 약간의 보리 열매를 얻을 수는 있었다. 초실절에는 먼저 익은 보리를 한단만 베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날이었다(레 23:9-14).

왜 보리를 대량으로 추수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이제 막 설익은 보리 한 단을 베어 하나님께 드렸을까? 여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가장 먼저 부활하실 것을 계시하신 것이다.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지난 그 다음 날 새벽에 부활하셨다(눅 24:1). 그 날이 바로 유대인들의 초실절이었다. 초실절의 보리 한 단은 ‘안식 후 첫날’(눅 24:1)에 부활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초실절의 처음 추수한 보리 한 단과 연관시켜서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라고 말하였다.
 

사도행전 2장에서 완전희 성취된 오순절

초실절로부터 오십일이 지나면 오순절이다. 초실절과 오순절 사이에 안식일이 일곱 번 지나가므로 ‘칠칠절’이라고도 하였다(신 16:9,10). 오순절은 들판의 모든 보리가 완전히 무르익어 본격적으로 추수하게 되었음을 하나님께 고하며 감사하는 날이었다. 본격적인 보리추수가 시작되기 전 하루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바로 그날 신약시대를 여는 성령의 지상강림이 일어났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날에 성령강림이 일어났다.

처음 익은 보리 한단을 제물로 드리는 초실절로부터 50일 후 오순절, 즉 본격적으로 보리추수를 시작하기 전 하루를 구별하여 감사드리는 그 날에 성령강림이 일어났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초실절의 보리 한 단이셨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믿는 모든 백성에게 영생과 부활이 주어지고, 참 하나님 백성되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자기 백성을 추수하시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밭에서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을 추수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시는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되었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믿는 자들에게 보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천국백성 추수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날도 아닌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다는 것을 바로 이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유월절이 성취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초실절이 성취되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보내심으로 오순절의 의미도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더 이상 이런 명절들을 반복하여 지키지 않는다. 그러나 오순절 신학자들은 구약의 오순절의 의미가 지금 개인적으로 성취되는 일이 반복된다고 한다. 모든 구약의 명절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의미가 완전하게 성취되었으므로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다고 가르쳐야 마땅하다. 만일 하나라도 완전하게 성취되지 못하고 지금 계속 성취되고 있다고 가르치면, 그때부터 신앙의 왜곡과 변질이 시작된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자기를 대신할 성령을 오순절 날에 보내셨다. 그것으로 구약의 오순절의 의미가 모두 성취되었는데, 어찌 지금 개인적으로 오순절이 반복된다고 할 것인가? 혹시 그 의미의 성취가 반복되고 있다면 반드시 구약 오순절 날에 맞추어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없으니, 오순절 신학자들도 오순절의 의미가 개인적 성취현상이 오순절 날에 맞추어서 일어난다고 하지 않는다. 매우 모순적이다. 개인적 오순절 재현을 주장하는 오순절 성령운동가들의 이론은 아주 그릇되었다.

성령의 반복적인 세례 주장은 이와 같은 신학적 모순에 기초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와 같은 유명한 사람이 동조하였다고 해도 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일반 오순절 성령운동가들은 오순절이 개인적으로 반복될 때, 방언이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방언을 강조하지는 않으면서 같은 내용을 전개하였다. 그렇다고 현대의 방언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올바른 말을 하지도 않았다. 로이드 존스는 현대 방언에 대해 문을 약간 열어두면서 애매하게 말 하였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가 저질적 은사파들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 죽으심으로 구약의 유월절은 끝났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으로 구약의 초실절이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제사에 만족하신 하나님이 구속된 자기 백성들에게 다른 보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파송하심으로 구약의 오순절도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행 2장의 오순절 날에 성령이 지상에 강림하심으로 구약의 오순절의 의미가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시대마다 개인적으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이 반복적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유월절이 시대마다 반복되고, 초실절이 개인적으로 반복된다고는 말하지 않으면서 왜 오순절만 개인적으로 시대마다 반복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날 성령이 지상에 강림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최초의 성령의 세례가 일어났을 때, 베드로는 주변의 청중들에게 설교했던 내용을 보면 더욱 명백해진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모든 택한 신자들에게 찾아오신 성령에 대해 예언한 구약의 내용이 그날 완전하게 성취되었다고 설교하였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 2:16-18)

사도행전 2장의 사건들이 사도행전 4장에서 동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또 벌어졌다는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아주 기본적인 성경해석의 원리에서도 크게 벗어났다. 로이드 존스는 사도행전 4장에 나타나는 땅이 진동(행 4:31)하였다는 특이한 내용 때문에 오해에 빠졌다. 아마도 땅이 진동하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 때문에 사도행전 2장에 맞먹는 성령강림이 일어났다고 착각한 것 같다. 만일 성령강림이 또 일어났다면, 사도행전 2장에서 나타난 다른 나라의 언어를 말하는 현상도 나타났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역사에서 한번도 땅이 흔들리면서 성령이 반복적으로 강림하셨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다.

사도행전 4장의 땅이 진동하는 특이한 현상은 심한 위급에 처한 제자들의 간절한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역사하시며 응답하신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가 계속 존재하느냐? 유대교의 핍박으로 사라지느냐? 의 위급상황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이 더욱 강하게 제자들을 다스리고 지배하게 하신 것이지(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 것이지), 성령을 추가적으로 더 부어주신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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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