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32회)

오순절주의의 방언 통역이 성령의 은사가 아닌 이유

통역은 양자 모두가 서로의 언어를 모를 때, 양자의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만약 어느 한 편이 양자의 언어를 모두 알고 있다면, 소통 가능한 언어를 쓰면 되므로 통역은 따로 필요 없다. 그래서 앞 장에서 예로 든,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예배하는 현장에서, 조용기 목사의 방언-통역은 그가 꾸며낸 종교 해프닝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가 서로의 언어를 모를 때 통역이 필요한 법인데,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언어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를 주실 때 회중이 아는 언어로 은사자에게 말하게 하실 것이다. 이 은사가 바로 예언의 은사다. 물론 고린도 교회의 예배 현장에서는 예언뿐 아니라 방언도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방언을 말하면 누군가가 반드시 통역도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언어를 다 아시지만 고린도 교회의 예배 현장에는 서로 언어가 다른 외국인들과 현지인 신자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과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통역이 필요 없다. 하나님은 이들의 언어를 아시므로 방언 은사자에게 이들의 언어로 말하게 하시면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고린도 교회 현지인 신자들 사이에서도 통역은 필요 없다. 하나님은 현지인 신자들의 언어도 아시므로 은사자에게 이들의 언어로 예언하게 하시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지인 신자들과 외국인들이 함께 있는 예배의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이때 하나님은 외국인들에게는 방언으로 말하게 하시고, 방언을 모르는 현지인 신자들을 위해서는 통역하게 하신다. 다시 말하면, 방언은 현지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을 위한 은사이며 통역은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현지인 신자들을 위한 은사다. 아마도 오순절주의자들은 예배에서 방언을 말하고 통역도 반드시 해야 했던, 고린도 교회의 예배 현장 사정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에 설명된 거짓 방언을(오순절주의자들은 고전14장 2, 4절 등에 나오는 방언이 거짓 방언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근거로 고린도 교회에도 없었던 거짓 통역까지 하면서 그럴듯하게 종교 해프닝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오순절주의의 방언 통역이 성령의 은사일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오순절주의의 방언이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과 맥을 같이하는 거짓 방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짓 방언을 통역하는 통역의 은사도 당연히 거짓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거짓 통역을 성령의 은사인양 설명하는 방언 통역 설명에서, 애매모호함과 여러 가지 모순이 발견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면 오순절주의의 방언 통역이 왜 거짓인지를 이들이 하는 통역 설명으로 한 번 살펴보자.

방언 통역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영음 방언을 통역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지금까지 오순절주의자들이 설명한 영음 방언의 특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의 설명대로라면 방언기도는 통역할 필요도 없고, 또 통역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은 인간의 언어로는 불가능한, 심오한 것까지 표현할 수 있는 하늘의 언어다. 그렇다면 하늘의 언어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방언기도는 통역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아무리 심오한 내용의 영음 방언이라 할지라도 다 알아들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영음 방언이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는 하늘 언어가 사실이라면, 영음 방언은 인간의 언어로 통역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어서 하늘 언어로 표현한 영음 방언을 다시 인간의 언어로 통역해서 표현한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개가 인간의 말을 몰라 왕왕 짖어 놓고, 그 짖은 소리를 개가 다시 인간의 언어로 통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개가 개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통역할 수 있다면, 처음부터 개소리 대신에 인간의 언어로 말하면 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오순절주의자들의 영음 방언이 인간의 언어로 통역 가능하다면, 하늘 언어로 먼저 말하고 그것을 통역하는 것은 한마디로 웃기는 코미디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하나님도 아시고, 회중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의 언어로 말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방언으로 먼저 말하고, 스스로도 불완전하다고 인정한 방언 통역으로 방언의 뜻을 말하고 있다. 이상하다!

오순절주의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방언으로 기도할 때, 방언의 의미도 함께 생각난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들은 동시통역을 하고 있는 셈인데, 참 대단한 영적 고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오순절주의자들의 망상이 빚어낸 거짓말이다. 생각해 보라. 방언으로 기도할 때 그 뜻이 동시에 생각난다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불필요한 허튼 짓이 아닌가? 만약 성령이 바보가 아니시라면, 기도자에게 떠오르는 생각을 방언으로 먼저 말하게 하시고 또 그것을 통역하게 하시는 허튼 짓 대신에, 바로 기도자가 아는 말로 기도하게 하실 것이다. 특히 영음 방언은 설령 인간의 언어로 통역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절대로 통역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마귀가 그 비밀을 아는 날에는 하나님께 곤란한 일이 생길 테니까 말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으로는 길게 말하더라도 방언 통역은 짧아질 수 있고, 반대로 방언이 짧더라도 방언 통역은 길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설명은 제법 구체적이어서 사실인 것처럼 들리기는 하나, 이것도 방언 통역이 성령의 은사임을 믿게 만들려는 가증스러운 거짓말에 불과하다. 생각해 보라. 인간의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하늘 언어라면, 하늘 언어는 인간의 언어와는 비교할 없는 고등 언어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고등 언어로 표현한 짧은 하늘 언어를 하등 언어인 인간의 언어로 통역할 때, 통역이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므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길게 표현된 하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통역할 때, 아주 짧아질 수 있다는 말은 개도 웃을 코미디다. 왜냐하면 하늘 언어로 길게 표현한 것이 인간의 언어로 짧게 통역할 수 있다면, 영음 방언은 고등한 하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보다도 더 열등한 지하실 언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 통역은 통역자가 생각나는 대로 마음대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음 방언의 길이와 상관없이 생각이 길어지면 통역도 길어지고, 생각이 짧으면 통역도 짧아진다. 이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 낸 거짓말이 “방언으로는 길게 말하더라도 방언 통역은 짧아질 수 있고, 반대로 방언이 짧더라도 방언 통역은 길어질 수 있다”이다. 이렇게 이들의 방언-통역의 설명이 모순투성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 마디로 통역할 수 없는 거짓 방언을 통역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 때문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을 통역할 때 내용이 다 깨달아지면 다 통역할 수도 있고 조금만 깨달아지면 조금만 통역할 수 도 있으며,1) 때로는 틀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2) 즉, 이들의 방언 통역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심지어는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언 통역이 성령의 은사이며 전능하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라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설명이 가능한 것은, 이들은 지금 성령의 은사로서의 통역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낸 거짓 통역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통역 설명은 거짓 통역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는 틀리는 말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방언 통역을 할 때 방언의 메시지를 듣고 해석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서 말한다고 한다. 이것은 이들의 방언 통역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들의 방언 통역은 방언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통역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 소리를 듣고 마음으로 느낀 것, 생각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이 통역할 수 없는 거짓 방언을 통역하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까닭은 이들의 방언 통역이 사실은 통역의 대상이 되는 방언과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또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 통역은 처음에는 전혀 감이 오지 않다가 서서히 조금씩 느낌이 생기고 감동이 생기고 발전해 나가는 것이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거짓 방언 통역을 그럴듯하게 합리화시킨다.3) 그러나 방언 통역은 하면 할수록 실력이 향상된다고 말하는 이들의 주장은4) 어떤 면에서는 옳다. 왜냐하면 거짓말도 처음하면 양심의 가책 때문에 얼굴이 붉어지지만, 하면 할수록 실력이 향상되어 나중에는 거짓말을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옹자들은 피나는 통역 연습과 훈련을 강조한다.5)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만이 거짓말을 정말처럼 연기할 수 있는 훌륭한 연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연습을 많이 해도 타고난 재능이 부족한 사람은 훌륭한 통역자가 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이것이 방언에 비해 통역하는 자가 소수인 까닭이다. 왜냐하면 거짓말도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들의 방언 통역은 ‘통역의 은사’라고 부르기 보다는 ‘창작의 은사’, ‘때려 맞히기의 은사’ 또는 아예 노골적으로 ‘거짓말의 은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이 방언을 통역할 때, 어떤 때는 전체적인 의미만 깨달아질 때가 있는데, 이때는 개개의 단어들은 알 수 없다고 한다.6) 그럴듯한 설명 같지만 사실은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방언의 메시지를 구성하는 단어들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방언의 메시지 전체의 의미를 파악해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개개의 단어들을 다 알아도 방언의 메시지 전체의 의미를 파악해서 말하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이것은 마치 화가가 금강산의 산봉우리들의 모양이나 숲의 모습, 그리고 계곡 등 의 모습을 전혀 보지 않은 상태에서 금강산의 풍경을 그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금강산의 모습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금강산을 화폭에 담아낸 그림은 금강산을 그린 풍경화가 아니라, 단지 금강산처럼 보이는 상상화일 뿐이다. 결국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 통역이란 방언의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마음에 떠오르는 자신의 생각을 뜬금없이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방언을 구성하는 단어들을 모른다는 것은 방언을 듣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순절주의자들이 방언에 나오는 단어들을 모른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메시지가 없는 거짓 방언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있을 리 만무니까 말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 통역 이야기를 보면, 결국 이들의 방언 통역은 미래를 알아맞힌다는 점쟁이들의 짓거리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번은 다른 사람이 방언 통변을 하고 있는 것을 옆에서 들은 적이 있다. 방언 통역자는 “간이 좋지 않습니다”라고 통역해 주었다. 방언 통역이 끝난 후 방언 통역자는 그 사람에게 간이 좋지 않으니 병원에 가서 체크해보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 사람은 자신은 술, 담배도 하지 않고 너무 건강하기 때문에 건강 진단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중에 마음을 바꿔서 통역자의 권고에 따라 건강 진단을 받았는데, 놀랍게도 간암 초기였다는 것이다. 조기에 발견된 간암은 간단한 수술로 치료할 수 있었다.7)

어느 날 그가 목장을 거닐며 방언기도를 할 때 주님이 그에게 “오럴, 나는 네가 지금 걷고 있는 이 땅을 사서 여기에 나를 위해 대학교를 세우기 원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지만, 대학교를 짓는 큰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그래서 방언으로 기도하며 목장을 왔다갔다 거닐었고 방언 통역을 기다렸다. 통역이 임했을 때 그는 자기가 방언으로 기도한 것을 영어로 거침없이 통역했다. 그 결과 그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대학교를 세울지, 기금을 어떻게 모을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8)

지금까지 오순절주의자들이 설명하는 방언 통역은 마구 쳐대는 꽹과리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통역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꽹과리 소리는 단어와 문장으로 구성된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에, 꽹과리 소리를 통역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꽹과리 소리를 통역해야 한다면, 꽹과리 소리의 느낌이나 아니면 그 소리와 상관없이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통역은 성령의 역사가 필요 없다. 단지 꽹과리 소리를 듣고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실감나게 연기하면서 정말처럼 말할 수 있는 화인 맞은 양심만 있으면 된다(딤전4:2 참고).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 통역은 꽹과리 소리 같은 거짓 방언을 마치 성령의 은사처럼 보이게 하려는 가증스러운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방언 통역은 안개처럼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같은 방언을 여러 통역자들에게 동시에 통역하도록 하면 서로 다른 통역이 나오는 이유이며, 또 한 사람에게 같은 방언을 시차를 두고 두 번 통역하게 하면 통역 내용이 서로 달리지는 것도 같은 이유다.9)

아무튼 이들이 말하는 방언 통역의 설명은 결국 자신의 거짓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위장하기 위한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맺음말

어느 TV 방송 연예 프로에 중국어 통역사들이 출연했다. 함께 출연한 어떤 개그맨이 중국어로 유창하게 한 통역사에게 말했다. 그 통역사는 개그맨이 유창하게 말한 중국어를 통역하지 못하고 당황스러워 했다. 왜냐하면 그 개그맨이 말한 중국어는 중국어가 아니라 중국어처럼 발음한 헛소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때 다른 개그맨이 또 뭐라고 중국말로 통역사에게 말하더니(개그맨이 통역사에게 한 말은 ‘당신이 할 수 없는 통역을 내가 하겠다’는 뜻의 엉터리 중국어였을 것이다) 처음 개그맨이 한 중국어를 한국어로 진지하게 다시 통역하기 시작했다. (다음부터는 필자의 창작임을 밝힌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자 또 한 개그맨이 일어나 그 통역은 틀렸다고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통역했다. “우리 사장님은 나의 은행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노란 풀밭(오만 원 권 현찰 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침대로 인도하시는도다.”

방청객과 출연자들 모두 웃었다. 그런데 만약 개그맨이 처음 통역사에게 중국어로 말했을 때, 통역사가 그 헛소리를 짐짓 아는 척하면서 거짓말로 진지하게 통역했더라면, 그것을 듣고 있는 방청객들은 아무도 그 통역이 거짓인 줄 몰랐을 것이다. 그러면 개그맨이 말한 엉터리 중국어도 진짜 중국어가 되고 만다. 마치 오순절주의자들이 거짓 통역으로 거짓 방언을 진짜 성령의 은사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만약 여러 명의 통역사가 그 엉터리 중국어를 동시에 통역한다면 어떻게 될까? 통역사들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통역한다 할지라도 틀림없이 서로 다른 통역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그맨이 말한 중국어는 소리만 중국어였지 사실은 중국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순절주의의 거짓 방언과 거짓 통역의 불편한 진실이다!

 

-- 각 주 --

1) 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 p.91.

2) 로버츠 리어든, 방언기도는 즐겁다,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123.

3) 정 원, 방언기도의 은혜와 능력1(서울: 영성의 숲, 2012), p.429.

4) 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 pp.85, 89-91.

5) 정 원, 방언기도의 은혜와 능력1(서울: 영성의 숲, 2012), p.479.

6) 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 pp.90-91.

7) 김신호, 성령세례 받으면 방언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11), pp.128-129.

8) 로버츠 리어든, 방언기도는 즐겁다,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127.

9) 정이철,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 p.132; 문효식, 방언! 무엇이 문제인가?(서울: 크리스챤서적, 2008), p.143;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p.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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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