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팀 형성을 보자. 제1차 전도 여행을 끝내고 바울은 바나바에게 말씀을 전했던 여러 도시를 방문하여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자고 제안하였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려가고 싶어 했으나 바울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차 선교 여행 당시 여정이 힘들었던 마가 요한은 밤빌리아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떠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팀으로 마가를 합류시키는 일로 크게 다투게 된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팀 구성을 하는 도중 서로 다른 길을 가기로 결정한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키프로스로 떠나고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안디옥으로 떠나게 된다. 바울 일행은 루스드라에 이르렀을 때 평판이 좋은 디모데를 만났고 그들은 한 선교팀이 되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은 것일까? 물었다면 초대교회 두 거인이 따로 따로 응답을 받았을까? 바울은 바나바가 마가라 하는 요한을 추천하였을 때, ‘저는 요한을 데려 가고 싶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 기도해 봅시다’라고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초대교회 두 거인이 마가 요한 때문에 다툴 때 기질적으로 유순한 바나바가 “바울, 이런 일로 우리가 싸우면 되겠소? 서로 합치가 될 때까지 이제부터 기도하지요”라고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또한 한 번의 실수를 용납하고 품어 주는 바나바가 옳은가? 선교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한 마가를 용납하지 않는 바울이 옳은가? 둘 중 누가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가?

성경에서는 바나바와 바울 둘 중 한명이 틀렸다 하지 않았으며 이 둘은 초대교회 역사에서 각자의 분량에 맞게 사역을 해나갔다. 바울이 마가를 선교에 데려가도, 데려가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또한 마가는 바나바와 함께 해도,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므로 선교지 또한 어느 곳으로 가든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전도단의 선교팀 구성 방법과 성경의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팀을 구성하는 방식을 비교하면 성경의 사람들이 매우 경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전도단 사람’으로서 내가 누리는 축복 중 하나는, 내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놓고 함께 기도하며 분별해 주는 신실한 동역자가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다 보면, 어떤 나라에 선교사로 가라는 음성을 듣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반드시 다른 사람은 그 나라를 위해 중보자로 서라는 음성을 듣는다. 그 나라로 가는 선교사를 후원하라는 음성을 듣는 사람도 있다. 나중에 이 사람들이 한데 모이면, 한 나라를 위한 선교 팀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세워진다. 이러한 일이 예수전도단에서는 흔하다. 공동체가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듣다 보면, 누군가가 각본에 따라 연출한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들을 자주 경험한다.”(문희곤 목사, 예수전도단 대표)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를 앞에 두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서로 자기들이 호감도에 따라 선교 대원을 정했다. 하지만 예수전도단의 논리에 따르면 이들은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께서 선명히 지시해 주시는 그런 대원들로 구성했어야 하지 않은가?

회의도 마찬가지이다. 사도행전 15장은 교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모본을 보여준 첫 번째 회의이다. 일단의 사람들이 유대에서 안디옥으로 와 이방인들에게 ‘모세가 가르친 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들은 유대교 사람들이 아 니라 유대주의 그리스도인이었다. 이 일로 바울 일행과 이들과의 논쟁이 크게 일어났다. 갈라디아에서는 유대주의자들을 가르켜 ‘저주를 받을 자’라고 까지 하였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일행을 예루살렘 교회로 가게 하였다. 모든 사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대주의자들 즉, 적정한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말이 옳은지 바울의 말이 옳은지 회의를 시작하였다. 사도들과 이들은 많은 토론을 벌였다.

베드로가 일어나서 말하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은혜로 구원 받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베드로가 말한 후 무리들은 잠잠해졌고 바울은 말을 이어갔다. 하나님께서 이방인 가운데 행하신 기적과 표적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자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발언하였다. 베드로가 성령님께서 실제적으로 행하셨던 기적을 이야기한 반면 야고보는 구약 성경을 인용하며 이야기한다. 구약의 예언서들에서 말하는 것이 베드로와 바울, 바나바가 한 이야기와 일치한다는 내용이었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행 15:15-18)

그리고 야고보는 바울과 베드로의 증언과 경험 그리고 성경을 인용하여 자기가 판단을 말한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행 15:19)

이 회의는 구원을 얻는데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인가를 결정하는 중대한 회의였다. 교회사적으로 중차대한 회의를 진행함에 있어 야고보는 자기의 의견으로 단호하게 결정하였다. 결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다들 여기 보시오, 우리가 주의 일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아니오? 이러한 일로 사사건건 다툼과 논쟁으로 우리 의 관계를 깨야 한단 말이오? 신앙은 관계란 말이요! 관계! ... 그러니 바울의 의견과 유대주의자들의 의견, 둘 중 누가 옳은지 그것을 하나님께 물어 봅시다. 의견이 합치될 때까지 회의는 중단하고 각자 기도하기 시작합시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선입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 아닌 자기의 생각이 들리는 법입니다. 이제부터 각자 기도하고 일주일 후 다시 모입시다.”

일주일 후 다시 모인 자리에서 서로 하나님께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고 최종적으로 리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라고 해야 했어야 했다. 그 정도가 되어야 사도들의 회의가 아닌가? 그러면 예수전도단의 회의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NLT는 일 년에 몇 번씩 열리는데, 리더들은 여러 가지 사안을 놓고 다각도로 토론을 벌 인다. 때로는 침을 튀겨 가며 열변을 토한다. 서로 의견이 달라서 충돌이 벌어지면, 분위기가 싸늘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모든 참석자가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동일한 마음을 주신다. 참석자 모두 똑같은 음성을 듣는 것이다(물론 매번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확인 받을 수 있는 단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문희곤 목사, 예수전도단 대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와 예수전도단에서 말하는 음성 듣기는 전혀 다르다. 예수전도단의 하나님 듣기는 자기 상상력에 지나지 않는다. 맞지 않으면 한 번의 해프닝이고 맞으면 좋고의 식이다.

“기도하던 중에 마태복음 29장 1절 말씀을 받은 적이 있다. ‘올게 왔구나’ 싶어서 재빨리 성경을 뒤져 봤지만, 마태복음에는 29장이 없다. 하지만 허탈해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냥 ‘그래! 마태복음은 28장으로 되어 있었지!’하며 유쾌하게 한 번 웃고 다시 시작했다.”(문희곤 목사, 예수전도단 대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가벼운 일일까? 문희곤 목사는 스스로도 하지 못한 일들을 그의 추종자들에게 전파함으로 그들에게 헛된 멍에를 메게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 15:10)

문희곤 목사가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부분을 보자.

“기드온도 자신은 보잘것 없는 집 안의 가장 작은 자이기에, 아무 쓸데없다고 애원한다 ... 하나님은 그런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라고 말씀하신다 ... 단 한 명도 상대하지 못할 것 같은 기드온이 오히려 미디안 전체를 쳐서 쓰러뜨릴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 그런데 이 장면부터 겁쟁이 기드온의 태도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나는 연약하지만, 내게 말씀하신 분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그대로 될 것이다!’라는 믿음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되시는 표정을 내게 보이소서’(삿 6:17).”(문희곤 목사, 예수전도단 대표)

여기서 기드온의 말은 미디안과 싸우라는 메시지가 자신의 생각인지 하나님의 음성인지 헷갈려서 나은 것이 아니다. 현실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하나님, 정말 당신이십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기드온은 지금 미디안과 싸우라는 메시지가 자신의 생각인지 하나님의 음성인지 헷갈려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마음속에서 강하게 떠오르는 어떤 음성과 마주한 것도 아니다. 이런 주관적인 것이 아니었다. 기드온이 “하나님, 정말 당신이십니까?”라고 했던 이유는 현실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가 아니다. 보이지도 않는데 거역할 수 없는 막강한 어떤 기운이 기드온을 덮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난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은이...”(삿 6:11)

‘여호와의 사자’가 분명히 객관적 물리적으로 나타난 사건이다. 이렇게 말하는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낸 자냐고 질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되시는 표정을 내게 보이소서”(삿 6:17)

기드온은 확신을 받은 이후에 행동에 옮겼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게 내 말인지 하나님의 뜻인지(사실 문 목사가 가장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 불확신과 불분명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이다. 먼저 보고 그 보게 된 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존재라는 것이 확인된 이후에 행한다. 차분하게 이야기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 구별법에 관심 많은 문희곤 목사도 성경을 통해 이와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게 제 생각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라고 묻거나 갈등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 아브라함은 어떤가? ... 자식을 주신다는 것이 자신의 생각인지, 하나님의 생각인지에 대해서 전혀 갈등하지 않았다. 모세는 어땠을까? ... “이게 제 상상입니까, 하나님 음성입니까?”라고 물었던가? 그렇지 않다. 나는 정말 이 잡듯이 성경을 뒤져 봤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놓고 갈등하는 인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단 한 명도! 성경이 이런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다니, 놀랍지 않는가?“(문희곤 목사, 예수전도단 대표)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바울도 현재 예수전도단에서 시행하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법’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면 ‘이게 자신의 생각인지 하나님의 생각인지’ 궁금해 할 수밖에 없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마음먹을 때 우연히 마음속에 떠오른 상상으로 결정 내렸을 것이라는 생각은 유치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경험을 통해 그러한 결정에 도달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장막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여 땅에 몸을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소서”(창 18:1-3).

아브라함은 그들이 여호와의 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의 사자가 예언하기를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 하였고, 몰래 웃었던 사라를 책망하기까지 하며 신적인 요소를 보여 주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또 나타나신 것이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1-2).

믿음의 선조들은 의심이 없다. 그 음성의 출처에 대한 분별력을 선명히 가져서일까? 그렇지 않다. 이미 분명히 하나님의 현현하심과 하나님의 사자의 역사적이며 객관적인 등장과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확증을 가진 자들에게 무슨 확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가? 그저 선포하면 그뿐이다.

검사의 청구로 법관이 허가한 압수수색영장과 같은 것이다. 수사에는 압수수색영장을 받아야 한다. 수사 진행시 이 영장을 보여줘야 한다. 수사관들은 ‘이것이 효력이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라고 고민하지 않는다. ‘이게 효력 있다고 믿어야지, 강한 믿음을 가져야지’라고 하지도 않는다. 압수수색 영장이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것은 강한 믿음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사람들은 주관적인 확신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고도 확실한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예수전도단에서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과 같은 종류의 강의는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성경에서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성경 구절 인용은 모두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세심하게 마음 밭에 대답을 던져주는 경우는 성경에 있지 않다 ...(중략)

신앙의 비지성화는 성경을 대하는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성경을 광맥을 하나 하나 캐내는 작업은 사라지고 감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성경을 왜곡하게 되고, 이미 감각적 신앙으로 무장된 목사나 성도들은 성경이 왜곡되긴 말건 신경 쓰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문희곤 목사 등의 하나님 음성에 관한 책들은 언제나 한국 기독교 출판계의 베스트셀러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며 많은 교회와 선교 단체의 필독서로 추천되어지는 책이다. 그러나 그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성경적이며, 심지어 성경을 철저히 왜곡하고 있다. 철저히 성경적으로 왜곡된 책이 한국 기독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여준다.

문희곤 목사가 속해 있는 예수전도단은 이 외에도 많은 비성경적 도서와 비성경적 강의들로 채워져 있다. 예수전도단의 모든 사역의 바닥에는 문희곤 목사가 강의하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가 자리 잡고 있다.

각 종교에는 핵심 키워드가 있다. 그 핵심의 차이가 다른 교리를 만들어 낸다. 로마 가톨릭은 교회론이 핵심이다. 모든 교리 중앙에 교회론이 있고 점차 가장자리로 옮겨지면서 보다 덜 중요한 교리가 만들어 진다. 루터교는 칭의론이 핵심이고, 칼빈주의는 예정론과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 핵심이다. 이런 핵심 교리로 다른 모든 교리를 해석해 내는 것이다.

예수전도단의 핵심은 ‘하나님의 음성 직접 듣기’이다. 이것으로 예수전도단의 모든 사역은 지원을 받는다. 비성경적인 핵심 교리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예수전도단은 전반적으로 비성경적인 단체이다. 문희곤 목사의 책이 많은 평신도로부터 읽혀지는 것은 예수전도단이란 단체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기대감과, 유명 목사들의 추천사가 함께 작용하였기에 가능하였다.

어느 유명한 목사는 이 책이 ‘탄탄한 성경 신학의 기초 위에’쓰여 졌다고 이 책의 추천사에 써 놓았다. 도대체 어떤 부분이 ‘탄탄한 성경적 신학의 기초’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문희곤 목사의 논지는 ‘진리’로 표명되기에 이른다. 문희곤 목사의 책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추천자가 인쇄되어 있다. 

“문희곤 목사님은 이 자연스런 진리를 너무나 쉽고 통쾌한 해학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쉽게 쓰였지만, 결코 피상적인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은 탄탄한 성경 신학의 기초 위에서 필자의 간증과 함께 펼쳐집니다. 그래서 믿을 만하고 읽을 만하고 감동받을 만합니다.”(문희곤 목사사의 책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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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