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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정목사님께서 더 기틀을 잡아주시기를 바라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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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경
등록일
2023-11-28 04:3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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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
사도 바울의 하나님께서 정목사님께 최근에 이루게 해주신 성과 중 몇 가지 좀 더 선명하게 밝혀내셔서 확실하게 후대와 후배들을 위한 기틀을 잡아주시길 바라는 것들을 써봅니다. 앞선 (상),(중)의 글에서 소괄호 안에 성경 절들이 필요한 부분에 달려 있으나 여기에서는 가급적 겹치지 않는 곳에 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그 전에 능동적 순종 지지자들이 정목사님께서 마치 수동적 순종만을 주장하시는 것처럼 왜곡하고 정목사님의 원 주장을 잘못되게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확실히 바로잡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목사님께서는 분명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든 순종’을 주장하시고 있는데 말입니다.
약간만 반복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둘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준수하셔서 의를 획득하시고 그 의를 성도에게 전가해주셨다는 주장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사변일 뿐만 아니라 당연히 성경에도 위배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성육신하셔서 참사람이 되신 성자 하나님께서는 지금 한 위격 두 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해를 위한 좀 더 쉬운 표현으로 한 인격에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한 인격 두 본성이신 성자의 인격께서는 ‘속성교류’에 의해, 성육신하셔서 인성을 본성으로 가진 참사람으로서도 본래의 의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본래의 의는 칼빈도 ‘하나님의 의’라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바울의 설명에 근거하여 이 ‘의’의 속성이 바로 “온전한 모든 순종”이라고 하였고 이 온전한 모든 순종에 의해 십자가의 공로 바로 대속으로, 믿는 우리의 죄 사함이 성취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본래의 의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셨(고전 1:30)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칭의”인 “법정적 칭의”를 십자가의 공로로 인해 믿는 자들이 얻게 하셨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인 대속으로 우리가 얻은 “죄 사함”이 “칭의”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과 한 사람의 ‘순종’으로 능동적 순종 지지자들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로마서 5장 18~19절 말씀도 칼빈은 주석에서 의보다 ‘칭의’가 더 중요함을 명확히 했고, 십자가로 이루신 공로인 대속으로 얻은 우리의 “죄 사함”을 “칭의”라고 함으로서, 본래의 의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그 ‘의’의 특성인 ‘온전한 순종’을 통해 이루신 대속으로 믿는 성도가 얻게 하신 것은 ‘죄 사함’ 곧,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의가 아니라 의롭다고(본래의 의를 내 것으로) 여겨주시는 ‘법정적 칭의’를 말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수여자이시자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때 본질이 그림자인 율법의 정신까지 다 이루어졌고, 율법이 명령하는 것 이외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모두 순종하셨습니다. 예로, 율법이 명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으로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심을 알게 하셨으며, 율법이 명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림자인 율법의 요구하는 수준이 아니라 실체이신 자신의 수준으로(요 15:9) 이웃을 사랑하셨고(우리가 해야만 될 이 이웃사랑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아니고서는 순종 불가능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요 17:4, 새번역)습니다.

확실히, 정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든 순종은 본래의 의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원하시는 모든 것을 순종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시고 만족과 배상을 드리신 것입니다. 이 순종은 그를 믿는 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그리스도의 본래의 의를 우리의 의로 여기심을 받게 하는, 믿는 성도가 ‘칭의’ 곧 ‘죄 사함’을 얻게 하신 순종입니다. 쓰다 보니 약간이 아닌 많이 반복했습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리스도의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심(롬 8:3, 새번역)”으로 “죄인은 죽음으로 죄의 값을 갚으라”는 ‘율법의 요구(롬 8:4)’ 다른 표현으로 ‘율법의 의’를 그리스도께서 대속으로 성취하시며 믿는 우리가 ‘죄 사함’ 곧 ‘칭의’를 얻게 하셨음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칼빈도,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온전한 순종을 통해 우리가 얻게 하신 것은 죄 사함 곧 ‘칭의’이며 성취하신 의는 대속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신 것이고 순종이 전가되었다는 것은 온전한 순종을 특성으로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본래의 의’가 믿은 자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임을 말한 자신의 표현이 능동적 순종 지지자들에게 다른 내용으로 사용될 것은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의 제3 용도도 설명한 칼빈이 그림자인 율법과 실체와 성도와 언약의 관계를 깊이 있게 설명해주고 이를 정리해주었다면 하는 생각을 하지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지 않던 사회에서 칼빈 역시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루터와 칼빈 심지어 쯔빙글리와 볼링거에게서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능동적 순종을 핵심 부품으로 사용하며 행위-은혜언약으로 개혁주의 신학이 후대에 발전된 배경에는 자연법에 특별계시인 ‘모세의 율법’조차도 포함 시킨 스콜라철학의 영향도 있는 것은 정목사님께서도 역시 이미 제시하신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정목사님께 몇 가지 좀 더 선명하게 밝혀내 주시기를 바라는 본론의 두 번째 내용 부분이므로 조금 뒤쪽에서 말씀을 드리고, 본론의 첫 번째 부분을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아담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표현만으로도 정목사님께서 전하시고 싶으신 것들을 다 전하시는 데에 별다른 문제가 없으실 것입니다. 불사와 영생을 다르다고 트집 잡는 것에 대해서는 말장난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고경태 목사님께서 제기하신, 아담의 ‘불사(immortality)’와 eternal life로 성경에 표현된 ‘영생’은 차이를 구별하여 정리하지 않으면, 아담이 영생을 잃은 것처럼 양우리 안으로 들어온 양들 바로 하나님께 구원받았다고 인정받은 성도도 다시 구원을 잃을 수가 있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바로 ‘한번 구원은 영원구원’이라는 교리가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는 수납하실만한 문제 제기이고 사실은 꼭 수납하셔야만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한 겹만 더 펼쳐서 설명하면 그리 어렵지 않은 설명입니다.

아담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되었고 불사도 부여받았습니다. 웨신서 4장과 6장에 의하면 ‘본래의 의’도 부여받았습니다. 정목사님께서 영생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이미 여러 번 강조하신 대로 불사의 아담은 하나님께로서 ‘영원한 생명(딤전 6:16)’을 공급받고 누리고 있었고, 칼빈에 의하면 바로 ‘영원한 생명’ 즉 ‘불사’를 누리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양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구원받은 성도와의 차이는, 누리고 있는 그 ‘영원한 생명’을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잘라낼 수 있느냐와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차이점은, 아담은 욕심 때문에 미혹되어 하나님처럼 되고 죽지 않는다는 말을 선택하여 실행에 옮길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 성도는 애초에 믿음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본래의 의를 나의 의로 여기심을 받고 성령께서 상속의 담보이시기(엡 1:14, 새번역) 때문에 사실상 하나님을 떠날 자유의지는 없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면, 칼빈의 설명처럼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노아의 무지개처럼 상징으로 사용하셔서 아담의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셨어도 하나님께서는 아담 쪽에서 이 관계를 단절할 자유의지를 허락해주셔서 이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믿음에 기초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갈 2:20)’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가 회복된 구원받은 성도는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수록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더욱 성장하게 되고 완전하게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과 관계가 더욱더 깊어져만 가게 되기 때문에,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상속받을 유업의 담보 되시기 때문에, 그리고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본래의 의를 나의 의로 여기심을 받으므로 (온전한 순종을 특성으로 가진 본래의 의와) 십자가의 공로 곧 보혈의 공로가 우리의 자유의지로 이 관계가 단절되게 하는 것을 사실상 없게 하기 때문에, 따라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이 "오직 하나님께만 불사(immortality)가 있고(딤전 6:16)" 이것이 영생인데, 아담은 이것을 부여받은 상태로 창조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창조되고 난 후 어느 시점에 선악과 계명이 주어짐으로 이때 "명시적으로" 이 불사 곧 영생이 아담에게는 박탈 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영생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박탈 되었다"와 "영생을 소유한 적도 없었다"는 논쟁의 여지도 없습니다.
또한 "영생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박탈 되었다(창 3:24)"와 "영생을 소유하고 있는데 박탈 될 수 없다(겔 36:27; 렘 32:40)"는 범죄한 아담과 구원받은 성도의 차이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불사(immortality)가 있기 때문에 불사 자체가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인데, 불사를 박탈당할 가능성이 후에 생겨난 아담과 달리 박탈당할 가능성이 사라진 상태가 된 성도에게 영원한 생명(eternal life, 롬 6:23)이란 표현을 쓰는 것이 가능해졌(cf. 창 3:22)습니다. 또한 성도의 영원한 생명(eternal life) 역시 하나님께 받은 은사(gift, 롬 6:23)입니다.
'양자의 영'을 받은 성도는 사실상 믿음을 깰 수 없지만, 영생은 정목사님께서 여러 번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있고 아담은 이미 "누리고 있는(딤전 6:16)" 이 "특별한 관계를" 아담 쪽에서 깰 자유의지를 보장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할 자유의지가 있느냐와 없느냐의 차이를 설명한다면,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영원한 생명’을(딤전 6:16) 불사의 아담 즉 죽음이 없는 아담이 처음부터(피조가 완료된 순간부터) 공급받아 "(은사로 소유하며) 누리고 있던 존재였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또한, 고경태 목사님께서 제기하신 설명되어야 할 문제도 해결이 됩니다. 논문이 여러 개 나와야 할 부분입니다.

정목사님께 몇 가지 좀 더 선명하게 밝혀내 주시기를 바라는 본론의 두 번째 내용 부분을 이어서 말씀드립니다.
율법의 제3 용도도 설명한 칼빈이 그림자인 율법과 실체와 성도와 언약의 관계를 깊이 있게 설명해주고 이를 정리해주었다면 후대에 논란이 적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지만, 모를 일입니다. 루터와 칼빈 심지어 쯔빙글리와 볼링거에게서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능동적 순종을 핵심 부품으로 사용하며 행위-은혜언약으로 개혁주의 신학이 후대에 발전된 배경에는 자연법에 특별계시인 ‘모세의 율법’조차도 포함 시킨 스콜라철학의 영향도 분명 있습니다.
13세기 사람인 스콜라철학의 대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자연법에 특별계시를 일부 포함 시킨 것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정목사님 설명대로 17세기 영국도 이 스콜라철학의 영향 아래에 있었고 청교도의 황태자로 불리는 17세기의 존 오웬도 신학을 체계화하는 방법론으로 스콜라철학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7세기의 웨신서도 아담의 법과 십계명이 동일시 되었고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이라는 문구가 명시되어(19장 6항) 있습니다. 당시 스콜라철학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미쳤는지 조금은 알 수가 있습니다.

분명 칼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심(롬 8:3)”으로 “죄인은 죽음으로 죄의 값을 갚으라”는 ‘율법의 요구(롬 8:4)’인 ‘율법의 의(롬 8:4, 불가타역)’를 그리스도께서 대속으로 성취하시어 믿는 성도에게 ‘죄 사함’ 곧 ‘칭의(본래의 의가 전가되는)’를 얻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 ‘율법의 의’가 후에 칼빈을 따르는 개혁주의 진영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켜 준수하심으로 의를 획득하셨고 그 의를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신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바뀌었는지 정확한 과정은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알려진 바로는, 루터가 우리의 공로가 전혀 들어있지 않은 십자가의 공로로 예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를 “수동적 의”로 표현하고 우리는 이 수동적 의가 필요하다고 하며 별개로 행위로 율법을 준수하여 얻게 되는 의를 “능동적 의”로 표현하고 이 능동적 의를 배격했는데, 루터의 제자 플라키우스가 이 수동과 능동의 개념을 예수님의 순종에 적용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순종을 “수동적 순종”이라 하며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신 순종을 “능동적 순종”이라고 하였고, 고신 측 신호섭 교수님에 의하면 칼빈의 제자인 베자가 플라키우스의 책에서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베자에게서 배웠던 여러 사람 중에서 윌리엄 퍼킨스와 아르미니우스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정반대로 갈라지는 두 사람 모두 베자에게서 완전한 율법준수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준수하심으로 믿는 자들을 의인으로 만드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아르미니우스 쪽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확대하여 오직 십자가만의 공로에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믿음을 첨가하고 행위에 틈을 열어주어 결국 세미-펠라기안의 범주로 가버렸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가버린 아르미니우스와 달리 퍼킨스는 당시의 자연법을 이용하여 아담의 법과 십계명을 일치시키고 십계명이 곧 행위언약이라는 “행위언약 이론”을 가르쳤습니다. 권경철 목사님의 기고문에서 퍼킨스가 능동적 순종을 지지했다는 내용을 본 적은 있지만, 퍼킨스가 가르쳤는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베자의 제자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능동적 순종을 가르쳤다고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능동적 순종이 이미 영국 청교도에게 들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위험한 것은 루터 칼빈 쯔빙글리 시대 당시의 칭의와 전가 내용과 후기 개혁주의 시대의 칭의와 전가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십자가 공로로 성도가 얻은 죄 사함이 칭의이며 그리스도의 본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가르쳤지만, 17세기 청교도는 십자가 공로로 죄 사함을 받으며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준수하신 것으로 의를 얻고 그리스도의 본래의 의가 아닌 율법을 준수하여 얻은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다행인 것은 한국의 개혁주의 교회 성도들은 법정적 칭의는 들어보았더라도 능동적 순종은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성도가 교리를 알아야 하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7세기에, 개혁파 진영 내부에서 올라오는 소시니안주의, 알미니안주의, 신율법주의, 반율법주의 같은 주장들로부터 개혁교회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통신학의 체계화 작업에 힘쓰는 과정에서 개혁파 스콜라주의를 방법론으로 채택하여 여러 사변과 논쟁에 대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구원의 서정 중 하나인 '칭의'의 내용을 바꿔 치기 해버렸네요. 17세기 이후로, 성경 해석의 원리 “자증”을 무시한 능동적 순종을 장착한 “행위-은혜언약”이 논쟁과 도전에 얼마나 효과적인 대응을 했는지 알고 싶네요.

이 논쟁과 대응들은 크게는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구원의 공로를, 행위로부터 사수하려는 것으로 구분 지어 볼 수 있습니다.
행위로부터 사수라는 면에서 보면, 능동적 순종을 인정하지 않는 감리교파나 성결교파 오순절교파도 알미니안처럼 자유의지의 역할에 더 많은 것을 부여합니다, 개혁주의와 이들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예정예지를 따르느냐 예지예정을 따르느냐인데 결국 구별되는 점은 인간 자유의지의 역할입니다. 또 다른 차이로 개혁주의는 정목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신 대로 에베소서 2장 1절 말씀에 근거한 “죄인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시체와 같다”는 입장을 가지고 죄인을 향한 자유의지의 역할을 강조할 수 없다고 하는데, 알미니안과 웨슬리안은 죄인의 자유의지에 결국은 역할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니, 시체에게 회심을 준비시킨다는 ‘회심준비론’은 개혁주의 내부의 적이네요.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개신교 스콜라주의 방법론을 채택한 것으로 그동안의 여러 도전들에 정말 효과적인 대응을 한 것인지, 선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장을 열어 기틀을 다져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정목사님께서 후대와 후배들을 위한 기틀을 잡아주시기 위하여 좀 더 선명하게 밝혀내 주시기를 바라는 두 번째의 것입니다.

추가로, 스콜라철학의 자연법도 쓰지 않고 아담의 법과 모세의 율법을 묶지도 않고 행위언약 사상도 쓰지 않고, 은혜언약도 ‘유업을 받을 언약백성’을 위한 모세 때의 옛 언약과 예수님께서 세우신 새 언약으로 구도를 세우고, 유업을 상속받음을 유효하게 하는 ‘믿음을’ 이 구도를 관통하는 실로 바로 두 언약을 꿰는 실로 사용하며, 메시아를 가리키는 소식인 여자의 씨 아브라함의 씨 다윗의 씨 소식(Good News)을 사랑 때문에 선포하시고 그대로 주도하시며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이전 글에서 말씀드린 바가 있는 내용인데, 이전 글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내용의 소재 하나하나마다 논문이 수십 개씩 나오길 소망합니다.
[*여자의 씨 아브라함의 씨 다윗의 씨 약속은, 약속에서 계약 개념의 언약으로도 선포되는데, 먼저 약속 후에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갈 3:17)이며 이 언약이 예수님의 새 언약(갈 3:14)으로 이어집니다. 즉, 여자의 씨 아브라함의 씨 다윗의 씨 약속 선언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과 이어진 새 언약으로 성경은 설명하며, 또 다른 표현으로도 설명합니다. 그것은 비유(갈 4:24)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사라)을 따라 난 자손과 비유로 모세의 율법(하갈)을 따라 난 자손을 말하며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갈 4:28, 새번역)과 모세의 율법(갈 4:30, 새번역)을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유업의 관점에서 유대인 헬라인 할 것 없이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이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이며 유업을 상속받는 자들(갈 3:29)이며, 믿음 안에 있지 않는 자들이 율법의 정죄 아래에 있는 자들이며 구원도 없으며 따라서 유업도 상속받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약속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졌고, 믿음 안에서 하나의 언약으로 이어집니다. 율법도 언급하면, 믿음 안에서만이 율법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 역할을 하는데 그것도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오신 지금은 율법보다 복음을 먼저 전합니다.]
능동적 순종과 연관된 내용에 대해 다른 표현의 정리는 이러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이현령 비현령 방식으로 능동적 순종을 기술하는 것을 피했고, 모세의 율법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34문에서 보듯이 은혜언약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92문과 97문에서 알 수 있듯 "아담과 그가 대표하는 전 인류에게 계시하신 순종의 규칙은 도덕법"이며, "중생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행위 언약인 도덕법에서 해방"되었고, 98문에서 "도덕법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포함"되어 있다고 교리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행위 언약인 도덕법에서의 해방"이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본래의 의'가 전가된 것 때문인지, 능동적 순종이 말하는 율법 준수로 '획득하셨다는 의'가 전가된 것 때문인지는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참사람이신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본래의 의'의 특성 또는 속성이 "온전한 순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순종을 하시되 율법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이고, 이는 '십계명을 포함하여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웨신서 19장 6항)'이 죄 없던 첫 사람 아담에 이어 죄 없으신 둘째 사람이자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도 주어져 준수하셨다는 것과 다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율법의 명령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 것을 드러내셨(눅 5:24)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시는 기준은 성경에 설명되어(요 5:18~19) 있습니다. 즉, 율법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제2 위격이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수여자이시기 때문에 '본래의 의'에 의하여, 행하실 때 율법은 자동(?)적으로 그 정신까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가 행위 언약인 도덕법에서 해방된" 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본래의 의'가 전가된 것 때문인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율법 준수를 통해 획득하셨다는 의'가 전가된 것 때문인지 성경을 근거로 반드시 확인해야 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능동적 순종'의 근거는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이것은 검증으로 이미 밝혀졌고 확인되어졌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롬 8:5)"에게는,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으로 율법은 칼빈이 설명한 제3용법으로 우리에게 적용되며 그렇게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초자연 초차원 초세계에 미치고 있는 최고의 법에 삼위일체의 제2 위격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온전한 모든 순종'은 "십계명을 포함하여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에 제한되는 순종이 아닙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루터보다 26살이나 젊은 칼빈이 루터를 평생 존경하며 종교개혁신학 업적을 세웠듯, 정목사님보다 스무살 이상 젊은 칼빈 같은 신학자가 여럿이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성경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인 시므온 베드로가,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우리의 믿음과 같은 귀한 믿음을 받은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써,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랍니다. ....... 오직 은혜 안에서 자라고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자라라. 그분께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벧후 1:1~2, 새번역; 벧후 3:18, 흠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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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원치 않게 신학적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는 내용일 수 있어 첨부하는 글로서 적겠습니다. 부록처럼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바른 해석방법으로 인정되는 역사적 문맥적 해석에 기초한 유비적 해석과 역사적 문맥적 해석에 기초한 문자적 해석은 분명 차이가 있는 해석이지만, 철저히 역사적 문맥적 해석에 기초한 유비적 해석과 철저하게 역사적 문맥적 해석에 기초한 문자적 해석은 그 차이가 무척 많이 얇아지게 됩니다. 인천의 스데반 황 목사님의 설교와 미국의 존 맥아더 목사님의 설교를 보면 그것을 실감합니다. 특히 존 맥아더 목사님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R. C. 스프로울 목사님과 평생을 신학적 교류를 하신 것을 보면서 올바른 연합의 본을 보는 듯합니다. 정목사님께서도 이런 분을 많이 만나시고 교류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말씀 해석에 분명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습니다. 수학을 예로 들면 미적분을 사용하고 온갖 함수가 들어간 고차 방정식을 풀어나가도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기본적인 사칙연산을 어길 수는 없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모두 에러를 가진 설입니다. 구원과도 크게 상관이 있지 않은 아디아포라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성도라고 생각이 되어지면 그중 어떤 천년설을 주장해도 우선 기본적으로 존중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팔레스타인도 사랑하시고 이스라엘도 사랑하신다”고 말하며 실제로 양쪽 모두에게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현재 저는 주위에 한걸음 물러서서 지켜보라고 권합니다. 말보다는 양쪽 모두를 기도해주기를 권합니다. “만주 땅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고토다”라는 말은 만주에 사는 만주족과 원주민에게 통용되지 않고 우리 내부적으로 통하는 말인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고토”도 팔레스타인에겐 통용되지 않는 말입니다. 제 3자에겐 인디언의 미국이나 쿠르드족의 터키같이 강한 정복자에게 땅을 빼앗긴 피정복민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만주 중 남만주라도 되찾으면, 그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한쪽을 욕하거나 지지하는 입장을 뒤집겠습니까. 대안이 없으면 한걸음 물러나서 양쪽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맞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에 대한 말을 꺼내기로 결정한 것은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은 우리를 아브라함 민족이 아닌 야곱(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위호환 시키지 말고 성경대로 아브라함 민족으로 놔두고 유대인 중 믿는 자만을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진짜 이스라엘(롬 9:27)이자 진정한 아브라함 민족으로 상위호환 시키자는 말에 대한 정목사님의 답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목사님 안에 내주하셔서 조명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과 인도하심을 의지하고 이 글을 씁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는 말씀도 성경은 분명히 두 대상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히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의 새 사람’도 성경은 분명히 이방인 중에 “일부”와 유대인 중에 “일부”만을 ‘하나의 새 사람(엡 2:14, 새번역)’으로 만드셨습니다. 이들만이 성경이 공식적으로 표현하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갈 3:28~29, 새번역)’인 것입니다. 분명히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 된다”고 성경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자꾸 우리를 이스라엘이라고 표현하고 싶어할까요? 그것은 성경 말씀(마 23:39; 눅 13:35) 때문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이라 감출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제정신이 아니게 되어 예수님 재림 직전에 초림이 아니신 예수님을(슥 12:9~10, 새번역, 흠정역) 향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하겠습니까. 그 대상은 유대인 중에 양우리 밖에 있다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될 유대인들입니다.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대상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면 모를까 우리의 고백은 아닙니다.
분명히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 된다고 성경이 공식적으로 표현하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갈 3:28~29, 새번역)’이라는 이 성경의 공식적 표현을, 무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을 버리셨다고 하고 싶거나 유대인들은 더이상 효용 가치가 없다고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자꾸 성경과 달리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분명 주로 신사도운동권에서 이스라엘을 찬양하는 여러 빗나간 주장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생각해봅니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는 말씀에 포함될 수 있는 사람은 믿는 우리와 그리고 유대인 중 이미 믿음 안에 들어와 있는 유대인입니다. 더한다면 “불신자 이방인과 유대인” 중에 양우리 밖에 있어 아직 양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은 그 이방인과 유대인뿐입니다. 창 12:3절 말씀 때문에 이스라엘을 찬양하고 축복하는 것은 빗나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해당됨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더 정확히는 유업 상속의 자격을 가진 믿는 자, 바로 ‘한 새 사람’입니다.
비록 신사도운동권에서 이슈화해서 난리를 치더라도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부계 혈통에서 모계 혈통으로 유대인의 정의를 바꿨을 때, 그때 이미 피는 중요성이 약해졌습니다. 실제로 스파라드 유대인과 아쉬케나즈 유대인의 유전자 거리를 이미 연구했는데 유의미한 거리는 없었습니다. 찾아내도 일부 지파에서 일부 가계의 혼입 정도였습니다. 요즘은 기술이 정밀해졌습니다. 그렇더라도 일례로 한국 예배당 안에 있는 진짜 성도와 가짜를 걸러낼 수 없듯, 유대인을 몽땅 가짜라고 할 수도 없고 가짜를 모두 걸러낼 수도 없습니다. 진짜가 섞여 있는 한 유대민족으로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예배당 안의 교인을 모두 가짜라고 거짓말할 수도 없고, 역시 교회라고 부르지 않을 수도 없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독일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러시아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와 유럽계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아쉬케나짐을 도매금으로 아니 공짜로 카자리안으로 넘기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중동-스페인계인 스파라딤까지 그런 식으로 넘기는 것은 어려운일입니다.
조선후기 양반가의 몰락으로 양반이 아닌 자들이 족보를 사들였어도 연구에 의하면 1910년 실제 양반 가구(家口)의 비율은 1.9% 정도라고 합니다. 일제가 민적법을 시행해 모두 성과 본을 가지도록 한 후에 대한민국 인구 대부분 사람들이 양반이라고 주장합니다만, 이렇게 되었으니 양반 족보는 모두 가짜이고 양반은 모두 가짜인가요. 진짜 양반가문과 진짜 족보는 없는 것이 되었을까요.
할례받은 유대인들 중에 마음에 할례 받은 유대인들만이 하나님 아버지께 결국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짜 유대인으로 인정받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그 과정도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독자분들께서 잘 모르시겠을 때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관망만 하시더라도 사단의 앞잡이가 되는 것은 피하실 수가 있습니다.
작성일:2023-11-28 04:31:58 110.5.18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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