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최후의 하나님의 심판김세윤 교수가 왜 이단 시비를 받고 있을까? 특히 개혁주의 교회에서 김세윤 교수가 주장하는 칭의 구원론이 심각하게 거부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세윤 교수가 단지 그리스도를 믿어(세례를 받음으로) 칭의를 얻었을지라도 훗날 다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니다. 성경에도 구원 받은 성도들이 최후에 다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나온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이니 종말의 하나님의 최종 심판대를 피해 갈 것이라고는 말씀하지 않는다.“인자가 자기 영
지난해는 종교개혁 500주년 되는 해였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종교개혁자들이 천주교와의 피 흘리는 싸움을 겪으면서 다시 회복시킨 구원의 진리를 다시 확인하고 돌아보는 칭의론 토론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토론의 결과는 우리의 마음을 더 어둡고 무겁게 만들었다.한국 교회의 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들, 김세윤 박사(플러신학대), 박영돈 박사(고려신학대학원), 최갑종 박사(백석대학교 총장)가 자신들의 칭의사상을 밝히면서 앞장서 종교개혁 칭의론을 다시 돌아보는 토론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신학자들의 토론이 오히려
평소 김세윤 박사의 영향을 받은 목회자들 가운데 방언, 예언 등의 은사에 대해서 그릇된 자세를 보이는 사람들은 종종 보았다. 정통신학의 중요한 기초인 ‘계시의 종결’에 대한 이해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음을 간혹 보았다. 그런데 다음의 영상을 보고서 김세윤 교수 본인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세윤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나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을 확신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실제로 박 목사님이 나에게 말할
김세윤 교수가 주장한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 칭의 확정이 종말로 유보되었다는 '유보적 칭의론'이 한국 교회에 적지 않는 파문을 일으켰다. 그 동안 김세윤 교수는 새관점 학파 신학자들이 칼빈과 루터 등의 종교개혁자들의 사도 바울의 칭의 사상 이해가 한쪽으로 치우혔다고 보는 관점에 대해 일면 수긍하고 동시에 비판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자신의 칭의사상을 전개하였다.그러나 김세윤 교수가 신자들이 처음 믿을 때 얻은 '의롭다하심'을 확정적이고 영구한 것이 아니라 종말로 미루어졌고, 또한 이미 구원을 얻는 신자들도 다시 구원을 잃어버리고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위험스러운 칭의사상을 전개하였으므로 한국 교회의 개혁신학 진영은 김세윤 교수의 행위구원론적 칭의론을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그러나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는 2016년 10월 1일(토)에 총신대학교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회장 김용국) 35차 학술대회에서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 제목에 나오는 “해독문”은 독소를 해독(解毒)하는 글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2016.10.2.)는 위 논문발표 내용을 “새 관점학파 칭의론, 로마가톨릭과 뭐가 다른가”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 기사 제목은 최덕성의 논문과 ‘새 관점학파의 칭의론’를 대립시킨다. 그러나 논문은 김세윤 신학이나 새 관점학파의 신학의 칭의론을 가볍게 언급하고 있다. 언론보도문은 최덕성의 논문이 현재 한국 신학계에 가장 뜨거운 이슈에 대한 명료한 이해와 길을 제시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회장 김용국) 제35차 학술대회 및 정기총회가 지난 10월 1일 서울 사당동 총신대학교 제1종합관 세미나실에서 개최됐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가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解毒文)'을 주제로 발표했다. 발표에서 최 박사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거부하는 가톨릭의 트렌트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 칭의론을 비판하는 칼빈의 해독문(Acta synodi tridentinae cum antidoto, 1547)을 통해, 최근 (바울신학의) 새 관점 학파와 김세윤 박사 등의 칭의론이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유사하다고 주장했다.최덕성 박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교회에서는, 새 관점 학파 칭의론이 불러 일으킨 논쟁
요즘 한국 교회에서 칭의, 성화에 대한 그릇된 주장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플러신학교 김세윤 박사와 백석대학교 총장 최갑종 박사께서 매우 위험스럽고 비성경적인 칭의신학을 주장하였다고 들었다. 성경과 신학에 관하여 어느 정도 이해를 가진 분들이라면 이 분들의 주장이 너무도 비성경적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어떤 분은 나에게 이 두 분의 주장이 루터가 1517년에 시작한 종교개혁(‘신앙회복’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됨)을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음모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매우 심각한 주장이라고 하였다. 김세윤 박사와 최갑종 박사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의미를 믿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였음이 영구한 효력을
존 파이퍼가 톰 라이트의 견해에 대한 변호의 책 제목이 (신호섭 역, 부흥과개혁사)이었다. 톰 라이트의 저술은 (에클레시아북스)에 근거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승구 교수와 박영돈 교수가 변론서를 펴냈다. 그럼에도 새관점학파의 기세를 잡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 김세윤 교수도 (두란노, 2002)이라는 저술로 대응했지만, 결국 새관점 학파의 흐름을 막지 못하고 굴복된 듯하다.최갑종 교수는 김세윤 교수를 지지하면서 ‘새관점’을 기준하여 ‘옛관점’이라고 했다. 옛관점과 새관점은 유대교(율법주의/언약적 신율주의)에 대한 이해, 다메섹 체험(회심과 소명/소명)에 대한 이해 등에서 결정적 차이가 있다. 당연히 예수의 지위에 대한 이해도 다르다. 우리에게 익숙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성경'에 대하여 가장 먼저 언급한 이유에 대한 개혁신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성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결국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지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신자의 구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현대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에서 성경은 불완전한 사본학적 말씀으로 후대에 삽입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성경은 인간이 조합하여 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고, 어떤 부분의 내용은 무오하지 않고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내용들 중에서 어떤 더 복음적이고, 어떤 부분은 덜 복음적이라고 주장한다.김세윤 교수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김세윤은 이렇게 성경에 대하여 불완전한 사본학적인 주장을
김세윤의 신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통신학에서 사용하는 신학적인 용어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예수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한 예수가 창조 때 하나님의 일을 시행하는 시행자로 활동하였다고 하며, 칭의를 예수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의롭다고 칭함 받는 것은 유보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구원이 유보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가 중보자가 아닌 중계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김세윤이 말하는 중계자는 무엇인가? 김세윤에게 있어 예수가 중계자라고 하는 것은 그가 예수에 대한 이해를 아주 단순하면서도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단어이다.한마디로 말해 중계자란 ‘중간에서 받아 이어주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영어에서 mediator가 중재인, 중재자라는 뜻을 포함하고
“칭의가 종말론적으로 유보된 것”이라는 김세윤 교수의 주장은, 조금 자세하게 말하면 “십자가에서 칭의가 포괄적으로 시작했고 완성은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 정확에 가까운 요약인 것으로 보였지만, 고경태 목사님의 비평에 의하면 세부적으로 사용된 개념과 설명을 보면 문제가 많은 것을 봅니다.김세윤 신학에 대해서 고경태 목사님이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김세윤 신학에서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무한, 충만에 참여하게 됨’이다(두란노, 칭의와 성화 57p ) 그래서 ‘구원의 결국’을 ‘하나님과 같이 됨’을 목표로 제시했다(두란노, 칭의와 성화 58p)또한 임진남 목사님이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아포데오시스(apotheosis) 즉 인간이 참으로 하나님
김세윤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드리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라고 정의했다(159쪽). 앞에서는 ‘깨닫는 것’이라고 제시했다(149쪽). ‘받아드리는 것’과 ‘깨닫는 것’은 동의어이고, 인간의 전적 자기능력이다. 깨달아야만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을 유입(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세윤에게 ‘복음은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과 부활’인데, ‘이 내용’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불트만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159쪽).그리스도의 대신적/대표적 죽음을 받아드리는 것, 내포된 안에서 연합이 실제로 발생한 것이다(159쪽, 참고, 김세윤, [구원이란 무엇인가?], 두란노, 63-69). 김세윤은 복음을 받아드린 사람은 “예수가 주이시다”고 고백한다고 한다(160쪽). 필자는 서철원 박사는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김세윤 교수의 신학의 전제는 역사적 비평이다. 불트만의 역사적 비평신학을 계속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불트만뿐만 아니라 이미 예수의 역사적 탐구를 시행하였던 슈바이처나 그 이전의 사람들도 예수 탐구를 시작하여 예수가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만 제시한다. 이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특별하고 선택된 아들이며 고난을 받기 위해 세워진 인간 예수만 그들에게 있다.그들의 또 다른 특징은 문자비평으로 신학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개입하여 자신들의 주관적인 생각과 당시 문화적인 상황을 재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정확 무오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세윤은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역사적 비평과, 문자적 비평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김세윤은 고린도전서에서 ‘의’(義, 1:30)라는 단어, 세례 때 의인으로 칭함 받음(6:11), 율법에 대한 부정이 두 번 등장한 것(9:19-23, 15:33-57)으로 제시했다(148쪽). 그리고 고린도후서에서 칭의론에 대한 가르침이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고 했다(148쪽). 모세를 통해서 준 옛 율법의 언약과 그리스도를 통해 준 새언약을 성령의 사역이 의를 주는 사역이라고 했다(148쪽).김세윤은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가 모두의 대표/대신 죽은 것과 죄를 위한 속죄제사로 의인이 되는 사건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하나님 나라)로 회복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149쪽).김세윤은 칭의 이해에서 바울 상태를 모범으로 제시한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음
한국 교회에 톰 라이트의 저술은 거의 다 번역되었다. IVP에서 많이 번역하였고, 몇 출판사에서 톰 라이트 저술을 번역했다. 김세윤의 저술은 기존에 저술들까지 모두 두란노에서 출판하고 있다. 과거에 발표했던 에세이들도 모두 묶어 책으로 출판했다. 김세윤과 톰 라이트의 책은 한국 교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이유는 독자들이 저자의 신학 전개가 사변적이지 않고 실제적으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톰 라이트의 저술은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있을 정도다. 많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전개하는 톰 라이트의 전개 방식은 기존의 신학 전개 방식과 전혀 다르게 때문에 신선하고 즐거울 수 있다. 그래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을 읽는 독자는 미로로 들어가는 입문서를 만난 것이다. 톰 라이트에서
김세윤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그리고 인터넷 매체에서 성도의 구원이 종말에 유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자신의 책을 읽지 않고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에서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인격적인 비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학자로서 자신이 무례한자임을 나타내보였다.김세윤 교수는 자신의 유보적 종말론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유보 (留保)”라는 말을 “예약 (豫約)”이라는 용어로 이해하면 된다고 말한다. 유보와 예약은 영어에서 같은 말로 사용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세윤 교수가 유보와 예약이 영어로 reservation 이기 때문에 정말 같은 의미의 단어인가? 미국에 살면서 reservation이 유보와 예약이 같은 의미라고
“예수가 하나님과 같다”라고 하는 김세윤 교수의 삼위일체 신학은 정통교회가 성경을 통해 세운 삼위일체 교리와 다르다. 김세윤 교수는 “예수가 하나님과 같다”라는 표현을 씀으로 인해 독자들에게 마치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일반적으로 김세윤 교수의 “예수가 하나님과 같다”라는 표현된 글을 읽는다면 마치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여길 수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김세윤 교수가 “예수가 하나님과 같다”라는 하는 표현은 계시자인 하나님이 계시되는 자인 예수와 같다는 의미이다. 쉽게 말하자면 계시자만이 하나님이다. 그런데 이 계시를 받아 전하는 자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시되는 예수가 계시자(하나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하나님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김세윤은 로마서 1장에서 두 개의 복음의 정의를 제시한다. 로마서 1장 2-4절과 16-17절이다(95쪽). 전자는 하나님의 복음,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고백(다윗의 씨)이다(97쪽).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는 자’로 기독론을 제시했다(98쪽). 후자는 구원론적 복음이다(103쪽) 김세윤은 롬 1:2-4을 고전 15:23-28, 롬 8:31-39에서 다시 반복한다. 그러면서 논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사도 바울이 구원론적으로 설명한 칭의로 제시한다. 하나님의 복음과 바울의 칭의 이해가 ‘동일’하다는 주장은 김세윤 신학에서 중요 개념 중 하나이다. 유대묵시문학 사상을 예수가 주장했고 바울이 반복해서 주장한다는 동일성 원칙은 21세기까지 변함없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묵시문학적 틀에서 나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국은 그 앞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단지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런 의미도 없다.”(사40:17)“나는 하나님이다.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와 같은 자는 없다.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않은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며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46:9-10)하나님은 만물이 필요하셨기 때문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고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만물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대로 존재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도하면서 이렇게 선포했다.
김세윤에게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라고 전편에 제시했다. 김세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의의 교사로서 기독론적 복음이고, 바울은 예수가 이룬 구원의 세계를 선포한 구원론적 복음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관계를 회복하는 동일한 과정으로 성화와 칭의이다. 바울의 칭의의 복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동일한 것이다(94쪽).법정적 칭의는 택자를 구주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여 의인의 삶이 시작되는 선이다. 그런데 김세윤은 법정적 칭의를 형벌적 범주에서 대신적 속죄 행위로 주장했다(15쪽). 김세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바울의 칭의의 복음이 동일한 것으로 주장한다(94쪽). 양자가 동일할 때에 복음에 풍성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지만, 한쪽이 빠져도 의미를 밝히는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