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는 그릇된 성장주의에 매몰되어 버렸다

성경신학자이자 구약 해석학의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월터 부르그만(Walter Brueggemann)은 그의 저서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에서 현대 미국 사회의 지배적인 현실관을 고대 예루살렘의 현실관과 오버랩 시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민주적 자본주의는 확실히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줄 미래의 흐름이다. 둘째, 미국은 민주적 자본주의의 복음을 확산시키려고 하나님이 선택한 대리자이다. 셋째 미국은 하나님이 주신 확신으로 보건데, 역사적 위험에서 면역되어 있다.”

말하자면 미국은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함께 하시는 이 시대의 대리자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모든 위험으로부터 면역되고 자동적으로 번영하며 잘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관은 고대 예루살렘의 지배적인 현실관으로부터 차용된 것입니다. 고대 예루살렘의 현실관 역시 3가지입니다. 첫째 성전은 여호와의 영원한 거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리자’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그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현실관을 그대로 본받아 적용한 것이 바로 현대 미국 사회의 지배적인 현실관이라는 것입니다. 부르그만은 이러한 현실관을 가리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미국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일종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도 이점에 있어서 결코 예외일 수 없습니다.
 

성장주의 가치관에 매몰된 한국교회 “예외주의”라는 괴물 낳아

오늘날 미국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지배적인 현실관은 어떠합니까? 마찬가지로 그들은 교회가 여호와의 거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목사는 하나님이 세우신 대리자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하며 잘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관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성장주의 가치관에 큰 동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관이 일부 무지몽매한 교인들의 맹목적 신앙과 결합하면 엄청난 시너지(상승작용) 효과를 발휘합니다.

오늘날 대형 교회의 목회자가 도덕적인 추문과 교회재정 유용과 남용으로 세상 법정에 서거나 세속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일은 이미 일상이 되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SNS에서는 사랑의 교회, 홍대 새교회, 오정현 목사, 전병욱 목사 이야기로 난리입니다. 대형교회라고 이슈가 된 것뿐이지 이런 일들이 어디 대형 교회 목회자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어쨌든 목회자가 그런 추문에 휩싸였다는 것만으로도 자성하고 기도해야 할 일인데 그들은 하나같이 회개하고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자신만만하고 당당해 보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당당하고 자신만만할까요? 가만 생각해보니 그들이 자신만만하고 당당한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의식 속에 그리고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수천, 수만 명의 교인들의 의식 속에 “예외주의”(exceptionalism)라는 우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확고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 교회를 보라!” ...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못되었다면 과연 이렇게 숫자적으로 축복을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문제가 있다면 매주 새신자가 계속 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정말 문제가 있다면, 우리 교회가 이렇게 대형교회로 성장했겠느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회의 크기가 바로 진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도덕적 추문의 그 어떤 증거도, 심지어 목회자가 사회법으로 단죄를 당해 실형을 살아도 죄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통제 못할 수준으로 커져버린 교회의 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 볼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수적 성장은 목회자의 면죄부

이러한 현상은 생각보다 전방위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최근 예장 평양 노회가 전병욱 목사 면직 재판을 미루다가 결국 무산시킴으로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 목사는 수도권에서 2년 동안 교회를 설립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홍대에 새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인터넷 독립언론인「뉴스타파」는 길거리에서 전 목사를 인터뷰했지만 전 목사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이어지는 홍대새교인의 인터뷰는 오늘 한국교회 교인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이 저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해결했을 것이다. 그리고 해결하지 않았더라면 저렇게 말씀과 부흥을 하나님이 허락하셨을리가 좀 어렸지 않겠나...”(뉴스타파 M).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깊은 ‘예외주의’(exceptionalism)가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에 관한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하신다는 것이죠. 그리고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말씀과 부흥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듣기에 좋고 교인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용서하셨고 더 나아가 축복하신 증거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회의 수적 성장이 바로 면죄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더함공동체」 대표인 이진오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는 멍청할 정도로 착하죠. 순수하고 순결하고 착하니까 그것이 진실을 가리고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고 그 사람이 또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방치하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거죠.”

저는 한국교회 성도가 착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들은 무지합니다. 그들은 귀찮습니다. 그들은 주도적이고 주체적인 신앙생활을 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목회자의 말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베뢰아 교인의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행 17:11). 그들은 신약성경이 묘사하는 목회자와 성도의 바른 관계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목회자를 마땅히 존경할 자로 존경하지 않고 그를 하나님 보다 더 섬깁니다. 그저 수동적으로 교회생활을 할 뿐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교회는 그저 사교클럽이고 복을 받는 기복주의의 전당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많이 모이고, 더 모이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모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복이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목회자들이 그것을 알면서도 너도 나도 교회를 성장시키려 눈에 불을 키고 이곳저곳 교회 성장 세미나를 찾아다닙니다. 교회가 성장해야 명함을 내밀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숫자가 좀 상당히 모여 주어야 말을 해도 먹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교인의 숫자가 권세가 되었습니다. 교인의 숫자와 예배당의 크기와 연간 예산의 금액이 진리 판단의 잣대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당에 사람들로 가득 채우면 된다는 정신이 오늘 우리의 정신입니다. 큰 집회를 만들어야 축복이라는 사고방식 말입니다. 교회는 무조건 크고 성장해야만 한다는 성장주의 가치관에 물든 한 이러한 폐단과 악습은 계속될 것입니다.

몇 일전 한 기독교 케이블방송을 보았는데 여의도의 대형 교회 담임 목사가 중국 어딘가에서 중국 교인들에게 통역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설교 가운데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부흥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교회부흥에는 고비가 있습니다. 첫 1백 명이 제일 어렵습니다. 그 다음이 3백 명입니다. 그 다음이 1천명입니다. 1천명이 되면 교회는 자동으로 부흥됩니다. 이 교회가 수천 명으로 부흥될 줄로 믿습니다.”

참 가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저급한 설교가 한국교회를 망치는 주범이 아닐까요? 신약성경 어디에 1천명이 되면 교회가 자동적으로 부흥된다는 근거가 있습니까? 오늘날 이단들을 보십시오. 이단들도 하나같이 수천 명 수만 명의 교세를 자랑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 됩니까? 그것이 진리 판단의 근거가 됩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설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12제자를 혼신을 다해 훈련시키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친히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제자들이 주님을 떠났습니다(요 6:66). 그래도 주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들과 얼마나 다르십니까? 그분에게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중요한 것은 제자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절대다수가 미자립 교회입니다. 그리고 절대 다수가 개척교회 목사입니다. 저는 그분들이 예외주의라는 우상에 미혹되지 않으며 성장주의 가치관에 매몰되지 않고 오늘도 꿋꿋이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아내시기를 응원하고 기도합니다.
 

교회는 거룩과 정결을 회복해야

오늘날 한국 교회는 예외주의라는 우상종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교회는 무조건 성장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자동적으로 대형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손봉호 교수는 월간 「개혁신앙」 창간호에서 도리어 대형교회가 나쁜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보다 개교회 성장에 치중하는 대형교회가 ‘우리 교회 우상’을 세우는데 일조하였고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고 결과적으로 교인과 교회 수가 줄어드는 데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

교회의 본질은 진리의 말씀과 거룩과 정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부릅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라고 호칭합니다(느 11:1; 계 21:10; 딤전 3:15). 반면에 세속은 화려하고 큰 성 바벨론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너지고야 말 것입니다(계 14:8). 오늘날 교회는 그 본질인 거룩과 정결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거룩과 정결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교회 자신이 그것을 회복할 능력이 없음을 온전히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대 교회가 타락으로 달려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숫자가 많고, 돈이 있고, 규모가 크고, 모든 종류의 문제를 다루고 해결할 각종 위원회가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인간이나 인간이 만든 모든 종류의 위원회는 생명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의 집단일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이런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 후 그런 무능력을 깨달았다면, 하나님께 겸손히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힘으로 될 수 없는 일이기에 오직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흰 옷을 입어야만 가능한 일이기에 그 옷을 입혀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생명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전반적으로 죽어버린 교회의 생명과 각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큰 성 바벨론의 문화를 비판하고 개혁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의 문화를 본받고 그들의 정신과 야망을 동경하여 바벨론의 길을 간다면, 교회는 거룩한 성이 아니라 도리어 사단의 회당을 만들었던 유대인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계 2:9; 3:9).

브루그만은 미국교회와 설교자들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미국 교회는 오랫동안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가 내야 할 복음의 목소리를 포기해 왔고 미국의 예외주의와 동맹을 맺었으며, 소심하여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브루그만의 이러한 진단을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와 설교자들이 따갑게 새겨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역시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현실관과 경제적인 이해관계의 덫에 빠져 교회가 마땅히 높여야 할 목소리를 포기했습니다. 설교자와 목회자들 역시 그저 성장주의 가치관에 매몰되어 선지자적이며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포기했습니다. 그저 우리 교회만 잘되고 내 교회만 부흥하고 성장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은 성경적 교회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천박하기 그지없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그저 금송아지 우상종교일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필요합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선지자가 필요합니다. 시류의 정신에 영합하지 않고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는 지도자와 설교자가 필요합니다. 물론 생명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목베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예비한다면 그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길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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