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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 갖고 사는 목사들이라면 이 사람 글을 보면서 미친 사람 취급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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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 갖고 사는 목사들이라면 이 사람 글을 보면서 미친 사람 취급 할 거예요
  • 정이철
  • 승인 2021.05.25 14:14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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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신 김병훈 교수가 이단시비 받고 있는 자신의 능동순종 교리에 대한 입장을 다시 발표하였다. 어떤 분이 김 교수의 새로운 글을 보내시며 통탄하는 자신의 심정을 함께 보내셨다. 정이철 목사는 그 분의 김 교수에 대해 통탄하는 말과 김병훈 교수의 새로운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김병훈은 교수도 목사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사람이고 본질이 틀려먹은 사람입니다.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 아니예요. 병자입니다. 죽어도 못고칩니다. 마귀의 자식이예요. 두고 보세요. 무덤까지 가져갈 겁니다. 제버릇 개 못줍니다. 영향력도 없는 사람이고, 그렇게 신경 안써도 됩니다. 할려면 하라고 내버려 놓으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요. 제정신 갖고 사는 목사들이라면 이 사람 글을 보면서 미친사람 취급 할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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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의 전가(김병훈 교수, 합신 조직신학)

(본 글은 2021년 5월에 발간 예정인 「신학정론」(39권 1호)에 게재되는 논문, 필자의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피스카토르(Johannes Piscator, 1546-1625) – 논점 정리”의 내용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논문을 참조 바란다. – 필자 주)

최근에 칭의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순종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개혁신학의 표준신앙에, 특별히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일치하는지, 더 나아가 성경의 교훈에 어긋나지 않는지에 대한 논의가 여러 모양으로 확장되고 있다.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이 의롭다 함의 근거로 보는 주장을 개진한 대표적인 학자는 피스카토르(Johannes Piscator, 1546-1625)이다. 그는 베자(Theodore Beza, 1519-1605)가 로마서 8장 2절을 주해하는 가운데 전개한 주장, 곧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와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을 의롭다 함의 근거로 보는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공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피스카토르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학자들 가운데, 피스카토르를 지지하는 이들로는 하이델베르크의 파레우스(David Pareus, 1548-1622), 헤르보른(Herborne)의 텍스토르(Bernhard Textor, 1560?-1602), 알텐호비우스(Johannes Altenhovius, †1616) 등이 눈에 띤다.

반면에 하이델베르크의 토사누스(Daniel Tossanus, 1541–1602), 바젤의 그리네우스(Johann Jakob Grynaeus, 1540-1617), 폴라누스(Amandus Polanus, 1561-1610), 루치우스(Ludovicus Lucius, 1577-1642), 볼레비우스(Johannes Wollebius, 1586-1629) 등은 베자와 같은 견해를 주장하였으며, 이후에 전개되는 개혁교회 안에서의 신학적 주류 견해는 피스카토르의 주장에서 거리를 두어 왔다.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총대들이 ‘의롭다 함’의 교리를 다룰 때, 이와 관련하여 활발한 토론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the whole obedience)를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호일(Joshua Hoyle), 워커(George Walker), 팔머(Herbert Palmer), 굿윈(Thomas Goodwin), 시맨(Lazarus Seaman), 그리고 가우지(William Gouge) 등이 있으며, 반면에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사람은 발언자 47명 가운데 8명으로, 이 가운데 가테이커(Thomas Gataker), 바인즈(Richard Vines), 템플(Thomas Temple), 그리고 우드콕(Francis Woodcock)이 있다.

총회는 최종적으로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견해에 대하여 분명한 거리를 두면서,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 개념을 반영하는 핵심 용어인 ‘모든 순종’(the whole obedience)는 그것이 기술적인 학문용어라는 점과 또 반율법주의(antinominan)를 함의한다는 수동적 순종의 지지자들의 항변을 고려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반영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의 전가에 관하여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논쟁을 이해하기 위하여,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부정하고, 오직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이 죄인을 의롭다 하는 근거라는 주장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간략하게나마 정리하여 향후 계속될 수 있는 토론의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두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개혁신학의 주류는 통상적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설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obedientia passiva)이며 다른 하나는 능동적 순종(obedientia activa)이다.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 당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일의 측면을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하시는 죄인을 위하여 받으시는 수동적 순종은 ‘기꺼이 자발적으로 받으신 능동적 고난’(passio activa)인 점을 이해한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율법 아래 오셔서 율법의 의를 행하신 일의 측면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에 따라 성자 하나님으로서 율법의 입법자이며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율법 아래 종속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능동적 순종을 행하신 일은 구속 사역의 필요에 따라 ‘당하셔야’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수동적 성격을 반영한다. 이런 의미에서 ‘능동적 순종’은 수동적 행위(actio passiva)라는 특성을 갖는다.

그러나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하는 시도에 경계심을 보인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결코 죄인에게 전가되는 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능동적 순종을 언급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며, 그것이 결코 의의 전가와 연결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구별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서로 분리되는 사역인가?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주장하는 견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구별하지만, 그리스도의 순종이 서로 분리되는 두 개의 사역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두 측면을 분리하여 능동적 순종은 영생을, 수동적 순종은 죄 사함의 은택을 주는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한 편으로는 죗값을 치루는 측면을, 다른 한편으로는 영생의 권리를 얻는 공로의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는 수동적 순종은 하나님의 명령을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라는 의미에서 능동적 순종이기도 하며 또한 죄인을 향한 사랑의 행위로서 율법을 성취한 것이라는 점에서 영생을 얻는 공로적 성격을 갖는다.

즉 단지 죗값을 치루는 형벌을 받으시는 수동적 순종의 측면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랑의 율법을 완성하는 능동적 순종의 측면을 또한 지니고 있기도 하다. 요컨대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는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이 서로 결합된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the whole obedience)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견해는 이러한 설명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이들의 생각에는 능동적 순종은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의의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와 분리되지 않는 단일한 사역이라는 주장 자체를 거부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 율법에 어긋남이 없으셔야 하는가?

이 질문과 관련하여 죄인의 칭의를 위하여 전가되는 의가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만이 아니라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를 또한 포함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나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자들이나 모두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 그리스도는 무흠한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순전히 이론적으로 말할 때 – 왜냐하면 실제로 있지 않은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만일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어긋난 일을 행하셨다면 죄를 범한 것이 되며, 대리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였을 것이므로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 자체가 인정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의를 이루시는 일은 자신의 영생을 위한 일이기도 한 것인가?

의의 전가와 관련하여 능동적 순종을 지지하는 거의 모든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가지고 계시므로 한 개인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영생을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위격적 연합에 의하여 취하신 제 2위격 성자 하나님이시므로 이미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신-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고 계시지만 피조물인 사람이 영생을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하듯이 자신의 영생을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하는 분이 결코 아니다.

율법의 의무는 인성이 아니라 인격에 지워지는데, 신-인이신 그리스도의 위격은 이미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율법의 의무에서 자유로우시며, 따라서 자신의 영생을 위하여 율법을 지키실 이유가 없다. 그런데 오히려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대표적 주창자인 피스카토르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하여 영생과 하늘의 지복을 위한 공로를 세웠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최근에 필자의 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8장 5항>”(「기독교개혁신보」, 2016.4.12. http://repress.kr/3719/)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생을 위하여 율법의 의를 지키셔야한다고 쓰고 있다는 주장이 들려오고 있다. 하지만 글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일은 위격적 연합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의의 보상을 통해 자신의 영생을 얻고자 하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보증인으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속한 죄인을 위하여 율법의 의를 이루심으로서 영생의 권리를 획득하신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일이 있다면 “희생제물로서의 자격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영생의 권리도 상실하게 되고” 만다는 글은 순전히 이론적인 말일 뿐이며, 실제로 그런 일은 있지도 않은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의의 전가와 관련하여 능동적 순종을 찬성하는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은 “행하면 살리라”는 율법 규정에 따라 율법을 우리를 대신하여 성취하시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며, 이 결과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기 위하여 율법 규정을 따라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에서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수동적 순종만을 주장하는 견해에 따르면, 타락한 이후로 인간은 자신의 부패성으로 인하여 율법을 성취하여 생명에 이를 수가 없게 되었으며, 율법의 순종을 통해 생명을 얻는 방식도 더 이상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도 죄인을 구원하고자 할 때 율법의 순종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 방식을 따라 행하실 수가 없다고 판단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하여 죄인을 의롭게 한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피를 흘려 구속하신다는 진술과 충돌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으로 인하여 의롭게 된 죄인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속죄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대해 순종하신 것은 희생제물의 자격을 위한 것이며 결과적으로 죄인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의한 공로가 의롭다 함을 위하여 죄인에게 전가되는 의에 포함이 되는가?

이 질문은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찬성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들은 죄인의 죄 사함과 영생을 위하여 죄인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시는 수동적 순종의 공로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보증인으로서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성취하신 능동적 순종의 공로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모든 순종’(the whole obedience)에 의한 의의 전가를 말한다.

반면에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자들은 율법을 성취하여 이루는 능동적 순종에 의한 공로는 의의 전가를 위한 것이 아니며, 필요하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판단에 죄인을 의롭다 하기 위하여 필요한 그리스도의 의란 죄 사함을 위한 수동적 순종의 의일 뿐이다. 그리고 영생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의한 공로를 근거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죄인을 의롭게 하는 죄인에게 전가되는 의란 무엇인가?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주장하는 자는 전가의 의를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하나는 죄 사함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그의 수동적 순종을 통해 죗값을 치르시어 죄책이 없다는(insontes) 선언을 얻게 되는 의미에서의 의이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성취하신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로써 의롭다는(iusti) 선언을 얻게 되는 의미에서의 의이다. 전자는 범법으로 인한 죄책을 면케 하는 소극적 측면인 반면에, 후자는 의로운 행위를 통해 주어지는 적극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인정하는 자의 견해에 따르면 죄 사함이 전가되는 의이며, 죄 사함이외에 전가되는 다른 의는 없다. 죄인은 오직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곧 죽음에 의하여 획득된 의로 인하여서만 의롭게 여겨진다. 정죄는 범한 죄 때문에 받는 것이므로, 죗값이 갚아지면 의로운 자가 된다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가 전가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의미를 잃는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견해는 만일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전가된다면 우리는 이미 의로운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없게 된다고 말한다. 곧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으로 인한 죄 사함의 필요성과 충돌한다는 주장이다.
 

영생은 무엇에 근거하여 얻는가?

의의 전가와 관련하여 능동적 순종을 찬성하는 견해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이 하나의 비분리적인 순종, 곧 ‘모든 순종’(the whole obedience)이라는 이해 안에서 죄 사함과 영생의 권리에 대해 말한다. 곧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을 분리하지 않은 채, 고난을 통하여 죄 사함을 이루고 율법의 의의 온전히 성취를 통하여 영생을 얻게 되는 원리를 말한다.

그러나 수동적 순종만을 주장하는 견해에 따르면, 영생은 그리스도이든 우리이든 누구에 의해서도 율법의 성취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생을 얻는 길은 율법의 성취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 의하여 죄 사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을 받는다. 그리고 영생은 바로 입양된 자녀로 받는 기업이지, 율법의 성취로 인한 공로가 아니다.
 

성경은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에 대해 침묵하는가?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반대하면서 오직 수동적 순종에 의한 전가만을 주장하는 이들은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지지하는 성경 구절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항상 옳지는 않다. 예를 들어 로마서 5:18-19, 빌립보서 3:9의 말씀이 능동적 순종의 전가교리를 지지한다는 주석이 가능하다.

또한 로마서 3:31과 같은 구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6절에서 일을 행하지 않고도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능동적 순종을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을 말하는 것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그리스도의 순종의 분리되지 않는 두 측면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해석을 열어준다.

스가랴 3:4에서 더러운 옷을 벗긴 다음에 벗은 몸으로 두지 않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순종의 두 측면을 시사한다.(참조, 고후 5:21) 또한 로마서 8:3-4의 구절에서 “율법의 요구”는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잘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한 구절만 더 들어본다면 로마서 10:4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의를 완전히 지키심으로 율법의 의를 추구하는 모든 시도를 폐하였음을 말하는 바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의 해석과 조화를 이룬다.

수동적 순종으로 인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분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교훈하는 성경구절이 수동적 순종만으로 인한 의의 전가를 지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으며,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포함하는 ‘모든 순종’(the whole obedience)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0:19의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피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뜻하지만, 이 고난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17세기 개혁신학의 많은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그리스도의 피’는 제유법적인 표현으로 의의 전가를 이루는 데에 능동적 순종에 의해 전가되는 의를 배제하지 않는다.

먼저 죄 사함을 받아 형벌을 면한 뒤에라야 영생의 의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의롭다함을 받는 일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앞서 언급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나오는 율법에 대한 말씀이나 율법의 순종을 기초로 주어지는 약속과 연관하여 언급되는 생명에 대한 많은 구절들은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치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맺는 말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643년 9월 5-19일에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의 전가와 관련한 토의를 가졌다. 그리고 47명의 총대들에 의하여 274번에 이르는 발언들이 있었고, 이중 8명의 총대들만이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총회는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the whole obedience)을 지지하는 반면에,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견해에 대하여, 결코 이단으로 몰아가지 않았지만, 분명하게 거리를 두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흐름에서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성경적이며 신학적으로 옳은 가르침으로 여기는 상황에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만을 주장하는 일부의 목소리는 신학사적인 검토를 세밀히 살피게 하는 유익을 주고 있다. 최근의 논의가 그리스도 안의 형제애로서 성경의 진리와 신학의 유산을 주의 깊게 살피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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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사리 2021-06-02 18:52:43
참담한 내용입니다.
오랜만에 신선한 궤변을 보는듯 합니다.

청명한 하늘 2021-05-30 16:45:09
제가 엊그제 자동차 키를 분실했습니다.

그 해결책으로 열쇠 업체에 전화를 해서 가격들을 비교해야 했고
모든 제작에 5만 원이면 가능한 업체에 전화를 해서 오게 했습니다.
다른 업체는 13만 원 불렀습니다.

제 차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어야 했고
열쇠 사장님에게 차 안에 저의 전화번호와 제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열쇠 사장님은 기계를 이용해서 열쇠를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키를 넣어서 열어보았더니 잘 열리고 시동도 잘 걸렸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자동차 키를 분실해서 열쇠를 열고 시동을 걸어서 자동차를 운행하기 위해서 필요했습니다.
만약 이 모든 과정을 다해도 자동차 키를 제작해서 문을 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부득이하면 그냥 폐차할 수도 있지만 저는 키를 제작해서 다시 타고 다니고 싶었습니다.
자동차 문을 열어서 다시 타고 다니려면 반드시 키를 제작해서 문을 열어서 시동을 걸어야 합니다.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죄가 들어와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망가지게 생겼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지으신 세계를 폐기 처분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을 사랑하셔서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은 죄 있는 인간들을 대신해 자기 아들을 보내서 피 흘려 생명을 값을 지불하고 죽음을 통해서 죄를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어 사람의 죄를 제거하는 방법 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방법을 계획한 것은 없습니다.
그 일을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자기 종들을 보내서 율법을 주시고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과 계획을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미리 약속한 때가 차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구속의 명령을 순종하셨습니다.
아들이 세상에 온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뜻은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속죄하시고 사람을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세우려 한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들은 아버지의 보냄에 순종하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피조물의 질서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셔서 구약에 메시아에 대해 예언된 그 일들을 실행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물 위를 걷고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수많은 일들을 행하셨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진정한 목적은 그러한 일들을 하기 위함이 아닌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구속의 일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길 수 있으면 옮겨주시라고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 잔을 마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피 흘려 죽지 않으시면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과 아버지께 버림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구속의 일도 없습니다.

모든 과정대로 아버지께 순종하신 것은 구원의 열쇠를 만들어서 구원의 문을 열기 위함입니다.
가격비교하고 업체 전화하고 이런 모든 과정을 다 했다 하더라도 키를 제작해서 차에 시동을 걸어 타고 다니지 않으면 차를 운행하는 데는 이 모든 과정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고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고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십자가에 죽는 것은 순종하기 않으시고 그냥 아버지께로 가셨다면
인류 구원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의 모든 순종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목표로 하고 있고 십자가에 죽으심 안에 들어있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꼭지가 따지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2021-05-27 02:55:34
2/2

셋째, 죄 있는 헬라인뿐만 아니라 율법을 맡은 하나님백성 된 유대인도 죄 아래에 있음을 선언하며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 율법이 말하는 바(롬3:19)입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는(롬3:20) 것이고 ‘율법의 요구’ 곧 ‘율법의 의’는 “죄인은 피를 흘려 죄의 값을 갚으라”는 것이며 이것은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에 의해 “대속”하심으로 성취되어 믿는 우리들에게 적용되고(롬8:3~4)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우리에게,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의 대속과 부활을 믿고 주로 영접하는 자에게(롬10:9~10) 성령께서(고전12:3) 적용하십니다(롬8:4).
“그를 믿는”(요3:16) 믿음 안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는(롬8:4) ‘율법의 요구’ 곧 ‘율법의 의’가 성취됩니다.

“그를 믿는”(요3:16) 자는 어린 아이라도 단순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갈2:20) 있으며 세부 지식은 나중에라도 자세히 알 수가 있습니다.



넷째, 능동적 순종 지지자들의 주장처럼 우리가 다시 범죄 해도 예수님께서 율법준수를 통해 획득하신 “의” 때문에 우리가 안심하고 의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믿는”(요3:16)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님백성으로서 성도로서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롬8:4)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다가 혹시 범죄 하여 넘어질지라도(요일2:1)
예수님의 율법준수로 인한 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하시려 “화목제물이 되신”(요일2:2)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회개하고(고후7:9)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복음의 핵심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자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두고 있습니다.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오직 믿음으로 2021-05-27 01:5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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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바른믿음에서 여러 번 예수님께서 “모든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만족시키시며 어린양으로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세상 죄를 지시고(요1:29)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케 하심을 이루셨으므로(골1:20)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이를 적용시키시고 계신다는 것을 밝혔고 동시에 능동적 순종을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음에도,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을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분리해 표현하며 마치 능동적 순종 지지야말로 “모든 순종”을 지지하는 것처럼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대놓고 성도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몇 가지 반드시 짚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의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을 율법순종의 범위로 제한할 수가 있을까요?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아니하시고(요5:30) 하나님 뜻대로 행하시는 예수님의 “모든 순종”을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
바로 이혼 시에 이혼증서를 써주는 등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몽학선생으로 주신 율법에 대한 ‘율법순종’ 정도로 제한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심으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것’도 ‘죽은 자를 살리신 것’도 인간에게 주신 율법에 대한 순종인가요?
선과 악을 알기 전의 ‘아담의 순종’ 수준에 비해서도, 죄가 없으시며 완전한 참사람이신 예수님의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신 “모든 순종”은 타락 전 ‘아담의 순종’과 비교할 수도 없는 차원이 다른 완전한 “모든 순종”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신 “모든 순종”은, ‘율법순종’의 수준으로 제한할 수도 ‘아담의 순종’ 수준으로 제한할 수도 없는 차원이 다른 완전한 “모든 순종”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든 순종”을 율법순종으로 제한하는 것은 예수님의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신 “모든 순종”을 절하하는 정도가 아니라 모독하는 것입니다.



둘째, 성자하나님께서 가지신 ‘본래의 의’입니다. 성자하나님께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본래의 의’를 가지고 계시며 성육신하셔서 참사람이 되신 참사람으로서의 예수님께서도 당연히 ‘본래의 의’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본래의 의’가 진짜이기에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실 수밖에 없으신 예수님의 “모든 순종”이 의로우신 예수님의 완전하신 순종이며,
이 ‘본래의 의’가 진짜이기에 이 ‘의’에 의해서 하나님 뜻대로 화목제물로 죽으시는 ‘순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시는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뜻대로 화목제물로 죽으시는 이것이 의롭다 인정받으신 행위입니다.
참사람으로서의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이 ‘본래의 의’가 진짜이기에 이 ‘의’에 의해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으신 행위(롬5:18)가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시는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대속’입니다.
이것이 ‘본래의 의’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으신 행위를 하신 것입니다.
칼빈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본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신대원생 2021-05-26 17:44:20
롬3:20-26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율법으로 의를 얻는 방법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지 의를 얻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그 의만 있으며 그것은 십자가의 피로써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시는 속량의 은혜로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외에 성육신하시고 율법에 순종하신 모든 순종은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시는 순종입니다. 또한 화목제물이 죄가 없어야 하기에 하는 순종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율법을 순종을 다하여서 죄가 없으면서 죽을 수 있는 인간인 존재는 본래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에 이 땅에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은 십자가의 희생의 피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피에 대한 고찰이 필요합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단순한 피흘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이 수반됩니다. 예를 들어 단순히 예수님께서 큰 고통없이 손목을 칼로 그어서 피를 많이 흘려 죽으셨다면 그것만으로 온 인류의 죄값이 치루어질까요?

마치 아사셀의 염소와 같습니다.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드려지는 제사에서는 두 마리 염소가 필요합니다. 한마리는 속죄소에 뿌려지는 피를 위한 것이고 한마리는 아사셀의 염소로 광야로 나가게 해서 굶어죽든 늑대에게 찢겨 죽든 죽을 때까지 계속 고통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피에는 고통이 같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고통은 바로 우리가 받을 지옥의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값이 첫째 사망뿐 아니라 둘째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을 지옥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사람으로서의 제약을 받은 불편함 자체도 그 고통에 포함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힘들게 수고하며 순종하신 그 수고와 고통도 십자가의 고통과 합쳐져서 우리의 죄값을 치룬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whole obedience)는 우리의 죄값인 사망(첫째,둘째)을 대신 담당하신 것으로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의의 법은 율법으로는 성취하는 법을 제정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고통과 동반된 십자가의 죽음의 피로 우리 죄값을 치루는 것으로 의를 주시는 것만이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유일한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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