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된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정이철 목사의 정승원 교수의 논문 발표에 대한 “정승원 교수(총신 신대원장)의 박형룡의 능동순종에 대한 연구 발표”(바른믿음)라는 글을 보았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은 2022년을 개교 121주년이라고 한다. 1901년에 마포삼렬 선교사에 의해서 설립된 평양장로회신학교를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소재열 박사, 최덕성 박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이러한 역사 이해에 대해서 의구심을 제기했다. 긴 역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역사의 중요성을 주장한 것이다.

총신대학교의 신학적 기둥은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이다. 그런데 박윤선 박사는 1980년대에 합신대학원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래서 총신대학교 정신의 기둥은 박형룡 박사이다. 총신대학교에서 박형룡 박사의 신학 전통을 바르게 잇는 신학자는 누구일까?

아직도 박형룡 박사를 신학의 깃발로 세우는 것은 적지 않은 아쉬움이다. 필자는 서철원 박사가 박형룡 신학의 적통을 잇는 계승자라고 밝힌 적이 있다. 서철원 박사는 박형룡 신학의 모든 것을 계승하지는 않았지만(특히 무천년기론) 신학적 위업에서는 박형룡 박사를 능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교단에 끼친 영향력에서는 비교하기 어렵다. 박형룡 박사는 51인 신앙동지회를 지도하면서 보수 신학을 지켰고, WCC 교단 분열에서 합동 신학을 건재케 했다. 이때 박형룡 박사 옆에는 51인 신앙동지회가 있었다. 51인 신앙동지회도 결국은 합동과 합신이 나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대한민국 장로교의 분열사에서 51인 신앙동지회의 분열이 가장 마음 아픈 일일 것이다.

정이철 목사는 정승원 교수의 “죽산 박형룡의 온전한(holistic) 순종”이라는 논문에 대해 평가했다. 정 교수가 박형룡 박사도 능동 순종을 가르쳤으니 합동 교단도 능동 순종을 문제삼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문제가 촉발되기 전에는 누구도 이런 문제가 있었는지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을 어떻게 정 교수는 설명할 것인가? 이 문제는 2018년에 나온 서철원 박사의 <교의신학>을 통해 제기되었다.

서철원 박사의 초기 기독론에는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제시했다. 필자는 1995년에 입학해서 1996년에 기독론을 배웠는데, 우리가 배운 교재에는 그 내용이 있었지만,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 내용이다. 정 교수의 주장이 타당하려면 합동 교단의 거의 모든 사역자들이 박형룡 박사의 가르침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서철원 박사도 개혁파 신학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수해서 강단에서 강의했으며, 가르치면서 그 문제점을 발견했고 마지막 작품에 문제성에 대해서 제기한 것이다. 한 신학자가 평생을 강의하면서 문제점이 있다고 제시했으면, 문제점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문제점을 제기한 것이 문제인가? 문제의식이 없이 답습하는 것이 문제이겠는가?

박형룡 박사가 자기 교재로만 한국 장로교회가 유지되기를 기대했다면 정 교수의 주장은 타당할 것이다. 교회의 선생은 교회를 위해서 자기가 낮아짐을 기뻐해야 한다. 박형룡 박사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구도화시켰는지를 밝히는 것이 학자의 기본 탐구이다. 선생이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것은 학생의 자세는 되겠지만 학자의 자세는 되지 않는다.

서철원 박사는 능동적 순종의 문제점을 “율법을 지켜 영생을 얻음”으로 발표했다(21년 2월). 정승원 교수가 “죽산의 온전한 순종”이란 제목으로 “능동적 순종”을 옹호하려면 그것에 대해서 명확한 의견을 표명해야 한다.

필자가 이해하기 힘든 어휘들이 많은데, “율법을 지키는 것”인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인지 둘 다 모두 사용할 수 있겠지만, 율법을 지킨다는 어휘가 훨씬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런데 왜 “율법에 순종함”을 강조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신학자의 글쓰기에 대해서 옹호하는 분이 해명하는 말, “그분의 사상이 아니라 객관적 글쓰기”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객관적 글쓰기에 대해서 생소할지 모른다. 그러나 서양 학자들은 의외로 객관적 글쓰기, 학문적 글쓰기를 많이 한다. 그 글쓰기에는 학자의 양심이 없는 글쓰기를 할 수 있다.

서철원 박사는 바빙크의 글쓰기를 그런 형태의 글쓰기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바빙크의 신학의 정수가 아니라, 모든 개혁파 신학의 내용을 총괄시킨 글쓰기를 한 것이다. 그것을 바빙크의 신학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 그렇게 평가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벌코프의 글쓰기를 보면 더욱 그렇다.

벌코프의 <조직신학>은 교과서로서 적합하다. 박형룡 박사가 왜 장로교 신학자 챨스 핫지 박사의 <조직신학>아 아닌 네덜란드 개혁파 교수인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번역해서 장로교에 소개했는지, 필자는 아직도 의문이 있다. 그리고 종말론에서는 벌코프의 내용에서 벗어난지도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추측은 있지만).

정승원 교수는 특이하게 박형룡 박사가 “온전한(holistic) 순종”이라고 했다고 한다. 박형룡 박사가 “온전한(holistic) 순종”을 말했을까? 의문이 든다. 본래 perfect obedience(완전한 순종)을 사용하는데, 왜 정승원 교수는 “온전한(holistic) 순종”를 말했을까?

박형룡 박사는 기독론에서 단순하게 순종을 둘(순종의 두 방면)로 능동적, 피동적으로 제시했다(박형룡, <기독론>, 1977. 349-340). 벌코프는 능동적-수동적을 제시하면서, 두 요소가 상호침투하고 있다고 제시했고, 고난과 죽음을 능동적으로, 율법에 복종하는 것을 수동적 순종 측면으로 소개하기도 했다(벌코프, <조직신학>, 이상원 역, 620).

벌코프는 “~영생을 획득하기 위해”(621쪽)라고 하는데, 이 부분에 문제점을 제기했었다. 영문은 Christ as Mediator entered the federal relation in which Adam stood in the state of integrity, in order to merit eternal life for the sinner. This constitutes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consisting in all that Christ did to observe the law in its federal aspect, as the condition for obtaining eternal life.이다. ‘획득(獲得)’이라는 어휘는 없다.

벌코프는 신자들에게 영생을 획득하도록 하기 위한 조건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획득한 것이 아니라, 신자가 획득하도록 그리스도께서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벌코프의 문장을 인정하기 어렵다. 말하려고 하는 것은 정승원 교수는 “온전한(holistic) 순종”이 박형룡 박사의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면 좋겠고, 왜 perfect obedience와 차이점도 알려주면 더 좋겠다.

우리가 옛길, 선생의 길을 따르는 것은 명예로운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그 길이 아닌 자기의 그 길을 가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지체는 주의 인도를 따라서 자기의 길을 간다. 그 길에는 반드시 협력이 있으며 형제의 동거함에 아론의 수염을 타고 내리는 기쁨이 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있느냐? 보다 좀 더 근원적인 문제는 “율법을 순종해서 영생을 얻음”에 대한 문제이다. 누구라도 율법에 순종하여 영생을 얻는 길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