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날드 맥클라우드(Donald Macleod, 1940-2023)
도날드 맥클라우드(Donald Macleod, 1940-2023)

 

(조엘 비키와 폴 스몰리의 ‘은혜를 위한 은혜로 말미암은 준비, 청교도들의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방법’에 대한 도날드 맥클라우 박사의 책 리뷰이다). 

회심은 보통 예비하는 율법의 역할(law-work) 후에 일어난다는 주장이 이 책의 핵심주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은 그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시기 전에 죄인들이 자신의 비참함을 인지하게 하신다고 회심준비론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논지는 이 교리에 대해서 깊이 있게 설명하는 데 노력하기보다, 처음부터 (루터와 칼빈을 포함하여) 이 교리가 개혁주의 진영 안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역사적인 연구에 집중되어 있다. 특별히 영국의 청교도들, 윌리엄 퍼킨스, 존 프레스톤, 윌리엄 아미, 리차드 십스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인 토마스 후커, 토마스 쉐파다, 존 카튼 같은 사람들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중요한 신학자들이 이 교리에 대해서 서로 일치된 견해를 갖지 않은 사실’을 증명하려고 했던 페리 밀러(1905-1963)나 다른 신학자들의 시도들을 진단하면서 원칙적으로 반박하였다.

동시에 비키와 스몰리 박사는 이 개혁주의 준비주의가 로마 카톨릭의 협동공리, ‘우리의 자연적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상으로 은혜가 주입된다’는 교리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개혁주의 은혜준비교리는 하나님 편에서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도움 없이도 죄인이 영적인 필요성을 감지하여 동기부여를 받으면 은혜는 단지 그들이 그리스도께 가도록 지원한다고 말하는 알미니안 교리와 구분되어야 한다는 사실 역시 계속 주장하였다.

이 역사적인 논의들은 의심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이 책의 핵심으로 제시되는 율법의 예비적 역할에 대한 견해다. 이러한 청교도들의 견해들과 상관없이, 과연 율법을 통하여 죄인들을 일깨워서 금방이라도 닥칠 것 같은 영적인 위험을 감지하게 하여 회심을 준비하게 하는 것이 죄인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방법일까?

이러한 견해는 분명히 17세기 청교도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증인들의 리스트는 그레이샴 메이첸, 마틴 로이드존스, 심지어 루터교도인 디트리히 본회퍼에게까지 아주 쉽게 확장될 수 있다.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의 특징이 되어버린 간증들은 종종 율법과 심판의 두려움으로부터 궁극적인 영적인 평화를 어떻게 찾게 되었는지 말해준다.

그러나 비키와 스몰리가 인정했듯, 율법의 예비적 역할이 모든 회심에서 반드시 나타나는 하나의 견본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막크 놀이 복음주의의 발흥 84페이지에서 지적했듯, 회심에 대한 묘사들은 에드워즈가 신실한 이야기(Faithful Narrative, 1727)에서 서술한 것처럼 ‘빠르게 많은 사람의 규범적인 영적 여정을 설명하는 견본’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회심을 말하는 사람들의 주된 내용은 자아에 대한 절망과 죄에 대한 강력한 인식이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또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이 죄 용서나 하나님으로부터 용납받음을 입증하는 풍성한 증거들을 얻기 전에 갖는 두려움과 괴로움의 심도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성경의 핵심적인 이야기들(Key Biblical Narratives)

우리가 논의의 중심을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로 전환하면, 예비적 율법의 역할 패턴은 확실히 항상 적용되지 않는다. 영혼의 고통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세례 요한의 이름을 딴 존 번연과 존 그래이샴 메이첸(What Is Faith, 129쪽)은 세례 요한이 이 부분에 있어서 아주 독특한 인물이라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인 부모의 자녀들은 종종 자의식을 갖게 된 순간부터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신뢰하게 된다. 이 언약의 자녀들은 죄를 알게 되자마자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된다. 이는 그들이 거듭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죄로 인하여 굳어지지 않는 옥토와 같이 어린 나이에 거듭난다는 말이다.

주님의 첫 번째 제자들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안드레의 경우에도 율법의 예비적 역할 패턴에 대한 암시를 찾을 수가 없다(마가복음 1:16, 19-20). 빌립과 나다나엘(요한복음 1:43-49), 마태(누가복음 5:27-28), 삭개오(누가복음 19:1-10)의 경우에도 그렇다. 이 모든 성경 본문에서 예비적인 율법의 역할에 대한 어떤 암시도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주님을 따르는 모습만 관찰된다. 물론 특별히 베드로의 경우에는 자기 인식(죄에 대한 자각, 역자 주)이 있었으나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난 후가 아닌 많은 물고기를 잡은 기적을 경험하고 난 후였다.

이와 유사한 회심 이야기들이 사도행전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빌립보에서 루디아는 주님에 의해서 마음을 열었고 이후 믿음에 이르는 그녀의 여정은 아주 부드러웠다. 전혀 괴로워하는 과정이 없었다. 빌립보의 간수 역시 아주 다르게 보인다. 지진 후에 곧바로 떨면서 자살하려고 하던 간수의 모습을 성경이 조명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어떤 예비적인 율법의 역할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혹 그 간수의 마음에 예비적인 율법의 역할 공식이 적용되었다고 해도 그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는 바울에게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바울과 실라는 그에게 복음을 제시하기 전 가장 먼저 율법에 대면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 안에 머물 것을 권면하며 주님에 대한 말씀을 말해주고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아마도 이 모든 일은 한 시간 안에 이뤄지지 않았을까?

심지어 규범적인 율법의 예비적 역할 교리를 지지하기 위하여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신약 성경의 많은 본문이 실지로는 겉보기와 달리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용하는 가장 유명한 본문이 갈라디아서 3:24이다. KJV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선생(Schoolmaster)으로 부른다. 그러나 헬라어 파이다고스는 학교 선생이 아니다. 그는 아직 어린 주인의 아들의 양육 책임을 맡은 노예에 불과하다. 주인의 아들을 맡고 있는 동안 그의 의무는 주인의 아들을 데리고 등교시켰다가 하교시키는 일이다. 그는 선생이 아니란 말이다.

그들의 논의를 이해하기 더 어렵게 하는 바울의 진술은 율법의 책임에 대한 것이다. 바울은 율법에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책임이 있음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라는 율법의 기한에 대해서 말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그리스도는 율법의 목적(마침)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율법은 확실히 도덕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 후 430년 후에 주어진 모세 율법, 토라를 가리킨다.

이 율법은 바울의 대적들이 이방인 개종자들에게도 강요하려고 했던 유대주의와의 거대한 경계선이다. 그러나 이는 바울이 명확히 밝혔듯 우리가 더 이상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법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종이나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아래에 놓인)미성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율법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지도 못했다. 반대로 토라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집단적으로 그들의 메시아를 거부하고 말았다.
 

성령의 일반적 역사와 구원하시는 역사

은혜준비론자들은 위의 본문들 가운데 하나도 공식적으로 수정하거나 삭제하지 않았다. 바울은 로마서 3:20에서 우리가 율법을 통하여 죄를 인식하게 된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0:4)는 성령의 일반적 역사를 말하는데, 거기에는 종종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도 심각한 죄인식이 가능함을 언급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예비적 율법의 역할을 성령의 일반적 역사 내지 구원하시는 역사로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유혹은 죄의 자각의 깊이를 가지고 둘 중의 하나를 추정하는 데 있다. 만일 그 죄의 자각이 깊이 있고 강력하여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분명히 구원하시는 은혜의 증표로 본다. 그러나 명백히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룟 유다를 보라. 그는 자기 죄를 자각하여 심한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서 자살하고 말았다.

앤드류대학의 Eric Stoddart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신앙 감정은 가끔씩 구원보다 강력할 수 있다(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59쪽, 1961, 진리의 깃발). 부흥의 시기에 주님께 나오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깊은 두려움에 빠지는 일은 분명 흔하게 있는 일이다. 율법은 복음이 그런 것 같이 돌과 같은 마음에 뿌려져서 즉시로 두려움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뿌리가 없어서 마침내 결실하지 못 한다(마가복음 4:17).

그렇다면 대체 예비적 율법의 역할에서 진실로 은혜로운 점이 무엇일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추정하듯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반드시 주님께 나온다는 말만 은혜롭게 들린다. 이러한 시각에서 죄에 대한 자각의 강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주 평범하게 보인다. 만일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면 예비적 율법의 역할은 충분히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반대로 그리스도께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하는 기준이 된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왔나? 거기에는 항상 괴로운 양심과 세상에 대한 환멸을 진정한 제자도로 오해하는 위험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늘 안주하지 않도록 모두에게 경고하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죄에 대한 깊은 자각으로 그리스도 앞에 나왔는지 진단하기보다 항상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 앞에 나왔는지를 성찰함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자각(의 진실성, 역자 주)을 시험해봐야 한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5:12에서 명료하게 진술한 내용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진부한 패턴(A Stereotypical Pattern)

본회퍼는 믿음은 필요의 산물이며 값싼 은혜를 전하기 위하여 믿음을 회개로부터 분리시켰다고 주장하였다(제자도의 대가에서 비싼 은혜 부분을 읽어보라). 그런데 청교도의 준비하는 은혜교리는 바로 이 본회퍼의 위험성을 그대로 가져온다.

그 위험성 중에 하나는 회심의 틀에 박힌 패턴이다. 청교도의 은혜준비론은 똑같은 구원의 요소들뿐 아니라 구원의 서정까지도 동일한 패턴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이 제시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는다. 특별히 죄에 대한 자각, 죄의 인식 강도 뿐 아니라 그 시기에 있어서도 사람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프랑스의 복음주의자 씨저 말란(Ceasar Malan)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머니가 잠든 아이를 입맞춤으로 깨우듯 일깨우셨다고 말하였다. 다른 사례에서는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이 선행하는 경험으로 오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성숙의 최고조에서 오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핸들리 모울 주교(1841-1920, 복음주의 성공회 신학자)에게서 일어난 일이다(자세한 내용은 J. C. Polloc과 Ian Randall의 Keswick Story<2006>, 90-93쪽을 보라).

케즈윅 모임에서 그가 들은 이야기는 ‘나에게 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나의 회심한 삶에서의 죄’를 바라보게 했다. 모울 주교의 회심에서도 율법의 어떤 예비적 역할을 경험했다는 증거가 없다. 단지 케즈윅에서 그의 심령을 상하고 주리도록 바꿔놓은 순간만 있었다.

만일 우리가 모든 회심 사건들을 일치시키는 확정적이고 규범적인 패턴이 있다는 인상을 전달한다면 이 패턴과 일치하는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구원에 대한 모든 확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시작한 예비적 은혜를 시작하지 않았거나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처럼 율법에 의한 두려움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왔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어떻게 시작했으며, 우리가 처음 이 여정을 왜 시작했고, 어떤 방법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는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못하게 된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성자께 나왔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경험의 깊이나 다른 어떤 것에 부응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 혹은 그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에 의해서 주님 앞에 나온 사실이 문제의 핵심이다.

소위 예비적 율법의 역할은 무서운 잘못된 신념의 기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신자들은 자신의 어떤 영적 경험이나 회심 과정을 높이 평가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높이 평가한다.

회심준비론의 또 한 가지 위험한 점은 회개를 전적으로 율법에만 연결한다는 점이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당하고 있는 사람이나 성부께 돌아오려는 자세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나 율법은 그 특성상 단지 법적인 회개만을 낳게 된다. 이러한 회개는 분명히 믿음에 이르는 여정 중에 한 가지 요소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불가항력적인 요소는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경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하는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는다.

골로새서 3:3을 보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이 하나님 안에 절대적으로 감춰진 안전한 상태로부터 이끌어 내는 선행적 회심상태(그리스도 밖에 있는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복음주의적 회개는 항상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을 포함한다. 위대한 청교도 모음집인 ‘현대신학’의 정수(에드워드 피셔, 1645년)는 회개는 믿음의 결과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것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다윗의 경우에도 그의 상한 마음(시편 51:17)은 하나님의 용서 선언 이후에 왔다(사무엘하 12:13). 그리고 그는 시편 51:1에서 주님의 은혜와 확고부동한 사랑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였다. 소요리문답 87문의 대답 역시 이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죄인이 자기 죄를 참으로 알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달아 자기 죄를 원통히 여기고 미워함으로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든든하게 결심하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새로이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의 회개 이전에 하나님의 자비가 선행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그 자비에 맡겼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자가 ‘신학의 정수’에서 지적했듯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과 근심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그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를 슬피 울게 만든 것은 그의 사랑과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우리의 자격 없음이다(누가복음 22:62).


단지 예비적일까?

그런데 청교도들이 정말 죄에 대한 인식을 유효적 소명의 준비로만 이해했을까? 소요리문답에서 죄에 대한 자각은 (Conviction of Sin)을 효력 있는 부르심(유효적 소명)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예정된 부르심의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데, 주께서 설복하시고 주께서 가능하게 하신다(God persuades and God enables).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설복하실까?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지식 안에서 조명하심으로 믿음을 갖게 하신다.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도 예비적이지 않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필요와 그 필요에 대한 답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게 한다. 그리고 설교자는 전체적으로 이 사실을 가르친다.

어떤 설교도 단지 죄인들을 은혜에 준비시키기 위하여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 중 누구도 단지 예비적인 회개를 위하여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 우리는 죄인의 회심에 목표를 둔다. 우리는 결코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집에 가서 은혜를 준비하라!”고 호소하지 않는다. 복음은 우리의 자격 없음이나 준비되지 않음을 근거로 회심을 지체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존 오웬이 그의 논문, “믿음의 근거(이유), 말씀을 들은 순간 믿음(The Works of John Owen, Vol. 4, 81p)”에서 밝힌대로 곧바로 회심하도록 묶여져 있다. 집에 가서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주님은 단순히 믿음만 주시지 않는다. 그는 가능케 하신다. 그는 마음들을 열어서 의지들을 새롭게 하신다. 그는 거듭나게 하신다. 이 일은 말씀과 분리되어 일어나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말씀이 효과적으로 역사하기 전에 반드시 우리를 새롭게 하는 패턴을 갖고 있지 않으시다. 주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시듯 그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그가 우리에게 가지도록 명령하시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신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에게 말씀하셨듯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은 주 앞으로 나온다.

이 경험은 가끔 ‘거듭남’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 단어를 가지고 죄인들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즉각적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기만해서는 안된다. 성경에서 오직 한 번 죄인들의 구원에 거듭남이라는 단어를 적용하였다(디도서 3:5). 이 구절에서도 새창조로서의 회심을 말한다. 주님은 단 하루만에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으셨으나 6일 동안 하시기로 선택하셨다. 이러한 패턴을 우리는 가끔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소요리문답 31번의 대답에 따라서 유효적 소명을 성령의 일(역사)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그 성령의 역사는 신적인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대한 이야기를 성령 자신의 심리적 족적으로 남기신다. 어느 정도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를 우리 자신의 영적 여정의 단계로 묘사하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는 항상 잠정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을 만지시는 하나님의 친밀한 성령의 역사는 항상 신비롭기때문이다. 우리의 영적인 삶에 남겨진 구속자의 족적들을 찾는 일은 창조에 새겨진 창조자의 족적을 찾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나의 마지막 의견은 다음과 같다. 루터 이래 줄곧 우리는 그리스도를 죄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괴로운 양심에 편안함을 주시는 분으로 바라본 결과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만 특별히 높이 평가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오직 제사장직만을 감당하신게 아니다. 사람들의 믿음은 결국 이 세가지 직분을 믿음 자체에 한 가지로 붙여 놓았지만 그리스도는 선지자요 또한 왕이시다. 믿음은 좀처럼 이 세가지 직분을 모두 한꺼번에 보지 못하고 한 가지 직분으로 편향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믿음은 일반적으로 제사장직으로 시작한다. 죄인의 마음에 괴로운 양심을 심어주는 일이 그 시작점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첫 번째 관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는 죄책감보다 더 많은 것, 무지와 불안을 가져왔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7:23절의 ‘모르는 신에게’를 보라).

많은 사람이 처음에는 괴로운 양심의 평화를 위하여 그리스도께 나올 때(제사장직),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가 그들의 진리에 대한 질문의 응답이기 때문에 나온다(선지자직) 그리고 그의 손안에 세상 전부를 가진 것 같은 분명한 확신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왕직). 그들은 서로 다른 지점에서 시작하므로 서로 다른 회심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사람은 모두 아들을 갖고 있으며, 아들을 가진 이들은 모두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상은 영어 기사 "Conversion; Must there be a Preparatory Law-Work?"을 김대운 목사가 번역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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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운 목사는 수원경성교회를 섬기고 있고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 신학전문연구위원으로 활동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경대로 전하기 위해 늘 쉬지 않고 연구하고 노력하는 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