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합동 총회는 여성들에게 강도사 고시를 볼 수 있게하는 결정을 했었다. 강도사가 되는 것은 말씀 선포의 권한을 허용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교회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치리권을 가지게 되는 것과 성찬을 집례하게 되는 것과 자동적으로 연결된다. 목사 안수는 허용하지 않을지라도 사실상 목사와 동일한 사역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안수를 허용하지 않으므로 괜찮다고 하지만, 그것은 변호사나 의사의 자격을 인정하여 정상적으로 일하게 하지만 면허증은 발부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모양새이다. 의사가 되어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수술도 집도하지만, 의사 면허증을 가지지는 못하는 것과 같다.

결국 여성들이 강도사 고시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곧 이서 “어중간한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 안수를 허용하자”라는 논의가 일어나게 된다. 여성안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전략으로 조금씩 조금씩 야금야금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므로 합동이 여성들에게 강도사 고시를 볼 수 있게 결의했다가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바로 그 다음 날 다시 취소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나중의 논란의 씨를 아예 없애기 위해 능동적 순종과 회심준비론에 대한 신학부 보고서도 없던 것으로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능동적 순종에 대한 신학부의 보고서를 보면, 핵심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가 고난과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또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준수하시어 우리를 의인되게 하여 영생에 들어갈 수 있게 했다는 과거 어리석고 청교도들의 핵심 신학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는 보고서이다.

신학부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보고서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사역만이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못 밖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생애 전체의 순종의 절정이며 십자가의 속량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이 능동적 순종의 본래의 의미대로 오해 없이 바르게 사용된다면 그 용어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순종교리에서 능동적 순종은 그 본래의 의미대로 오해 없이 바르게 사용된다면 명백한 개혁주의 전통의 교리이다”.

누군가 이 보고서를 작성한 분에게 물으니 청교도들이 말한 능동적 순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전부터(?) 말한 능동적 순종을 의미한다고 했다고 한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했음을 뜻한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청교도들과 다른 의미로 능동적 순종이라는 말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김효남 교수 등의 청교도주의자들은 분명히 이 문구를 악용하여 자신들의 능동적 순종이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예 이 보고서를 없애고 합동은 오직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자기를 죗값으로 희생하신 속죄 사역으로 완전한 구원을 주셨다고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회심준비론에 대한 신학부의 보고서에도 회심준비론의 심각한 이단성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고, 또 그렇다고 회심준비론을 권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 오해되지 않게 조심이 그 용어를 사용하라고 했다. 회심의 유일한 주체는 성령이라고 강조하였지만, 회심준비론주의자들도 같은 말을 한다. 문제는 율법이 선포되었을 때 성령이 죽은 영혼을 각성시켜 스스로 회심을 향하여 가도록 이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것이 성령의 사역이라고 성령에게 공을 돌린다.

그러나 죽은 영혼이 중생(회심)하기 전에 스스로 중생(회심)을 바라고 소망한다는 것은 펠라기안, 로마교회, 알미니안, 웨슬리안 신학이지 칼빈주의가 아니다.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말들로 가득한 신학부의 회심준비론 보고서도 차라리 없던 것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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