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33)

 

글을 시작하며

번역 성경(신약)에서의 오역과 오석들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아마도 이는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당시 유대인의 삶의 정황(생활환경, 관습 등)을 배경과 소재로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유대인들의 삶의 정황을 놓치면, 특히 예수님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진다. 따라서 번역 성경(신약)의 오역과 오석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교훈마저도 전혀 엉뚱하게 오해하고 있을 정도로 오역과 오석이 매우 심각하고 치명적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교훈은, 해석하는 이들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같이 공통되는 의견은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라는 것이다. 부연 설명을 한다면,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불의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에 불의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에는 초점을 맞추지 말고, 오직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의도하신 이 비유의 핵심 교훈은 결코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가 아니다. 나중에 상세히 보겠지만, 이런 심각한 오해가 당연한 정해로 받아드려진 까닭은 아마도 비유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채무 증서를 고치는 것’(5-7절), ‘이 세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8절), ‘불의한 재물’(9절) 등의 의미를 오해했기 때문일 것이며, 결정적으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로 영접하리라”(9절)에서 “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를 “영주할 처소”로 오역하여, 이를 “천국”으로 오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영주할 처소, 즉 천국)를 준비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불의한 방법(주인의 채무 문서를 위조하는 것)을 동원해서라도 미래(영주할 처소, 즉 천국)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이렇게 해석하는 자들은 불의한 청지기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주인의 채무 문서를 위조한 것은 범죄 행위가 명백하기 때문에, 보통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려는 핵심 교훈은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채무 문서를 위조하는 불의한 행위에 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보는 자들은 불의한 청지기의 불의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가 지혜롭게 자신의 미래를 준비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데, 그 중 한 가지를 미리 지적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선하신 품성에 심각한 손상을 가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는데 초점을 맞춘다할지라도 비유 속에서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채무 문서를 위조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오해하는 까닭은 앞에서 지적한 몇 가지의 오역과 또 비유 후에 예수님이 비유의 교훈으로 적나라하게 말씀하신 10-13절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예수님이 의도하신대로 바르게 이해한다면, 이 비유의 제목인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Simon J. Kistemaker는 “영리한 청지기의 비유”라고 제목을 붙였다)가 잘못된 제목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나중에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 비유의 제목은 “뉘우친 청지기의 비유”, 또는 “주인을 바꾼 청지기의 비유”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에 더 잘 부합할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의 주인은 의로운 자인가, 아니면 불의한 자인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살피기 전에, 먼저 불의한 청지기의 주인이 어떤 자인가를 아는 것은 이 비유를 바르게 해석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배경이 된다. 왜냐하면 그가 나쁜 자인가, 아니면 좋은 자인가에 따라서, 특히 5-7절과 8절의 의미가 완전히 달리질 수 있기 때문이다.

1절(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에서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주인을 “어떤 부자”리고 소개한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로서, 대단한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설교나 비유에서 부자는 언제나 불의한 자, 다시 말하면 나쁜 자로 설정된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 부자가 언급되면, 그는 나쁜 자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음을 놓치면 안 된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12: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에서 한 부자는 자기밖에 모르는 나쁜 자로 설정된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16: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에서도 한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 나쁜 자로 설정된다. 눅19: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에서 삭개오가 부자로 소개되는 것은 그가 나쁜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눅14: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에서 큰 잔치를 배설한 “어떤 사람”은 큰 부자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럼에도 부자로 소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불의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눅15: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에서 “어떤 사람”은 탕자의 아버지이며, 이도 대단한 부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탕자의 아버지에게도 부자라는 수식어는 붙지 않는다. 왜냐하면 탕자의 아버지는 불의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딱 한 군데 예외적인 부자가 있다. 이는 마27: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에서 부자로 소개되는 아리마대 요셉이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자신의 무덤에 장사 지낸 의로운 자이지, 결코 불의한 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병행본문인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서는 아리마대 요셉을 결코 부자로 소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유독 마태는 아리마대 요셉을 부자로 소개하는 것일까? 이는 마태복음의 일차적인 독자가 구약성경을 잘 아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이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됨으로써, 사53:9(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의 메시아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유대인 독자들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아리마대 요셉이 나쁜 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자로 소개했을 것이다.

아무튼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의 주인을 부자로 소개하는 까닭은 그가 불의한 자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독자들은 이를 염두에 두어야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오해하지 않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불의한 청기기는 정말 불의한 짓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는가?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눅16:5-7)

이 비유의 교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는 눅16:5-7에 기록된 불의한 청지기의 행위가 결코 불의한 짓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불의한 청지기가 해고당하기 전에 한 짓은, 구체적으로 무슨 짓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인에게 해고를 통보받을 만큼 불의한 짓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해고 통보 이후에 불의한 청지기가 자신의 해고 후를 준비한 행위는 결코 불의한 짓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눅16:5-7에 언급된 불의한 청지기의 행위가 주인의 채무 문서를 위조한 불의한 짓이 사실이라면, 이 비유는 더 이상 비유로서의 가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영주할 처소, 즉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어찌 범죄 행위로 친구를 사귀어서 영주할 처소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는가? 그럴 리는 결코 없다. 왜냐하면 이는 예수님의 선하신 본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런 치명적인 약점을 피하려고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은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는 것이므로, 불의한 청지기의 불의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가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어설픈 설명을 시도한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하라는 교훈을 하시기 위해서 비유를 말씀하셨다면, 이야기의 천재이신 예수님은 정당한 방법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이야기로 비유를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불의한 청지기가 채무자들을 불러다가 주인의 채무 문서를 고친 이야기는 청지기가 주인의 문서를 조작해서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 준, 다시 말해서 사문서를 위조한 불의한 짓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돈이나 곡식 등을 빌려주었을 때나, 또는 이방인이 유대인에게 돈이나 곡식 등을 빌려주었을 때에는 이자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 비유에 나오는 밀과 감람유의 당시의 이자율은 밀은 25%였으며, 감람유는 100%였다(예수님 당시의 정확한 이자율은 밀은 고정 이자율 20%, 변동 이자율 5%였으며, 감람유는 고정 이자율 80%, 변동 이자율 20%였다. 여기서 변동 이자율이란 흉년이 들거나, 이상 기후 등으로 인해서 수급에 문제가 생겼을 때, 부과하는 이자율이다. 그러나 당시의 불의한 부자들은 거의 대부분 변동 이자율을 고정 이자율에 포함시켜 채무 문서에 기재했다고 한다). 감람유의 이자율이 밀에 비해 4배나 높은 까닭은 밀은 보관하기가 비교적 용이해서 적은 비용으로 보관할 수 있었지만, 감람유는 사막 기후의 고온과 엄청난 일교차 때문에 변질되기 쉬어서, 보관하는데 밀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불의한 청지기는 100말의 기름은 50% 탕감해서 50말로 채무 증서를 고치고, 100석의 밀은 20% 탕감해서 80석으로 채무 증서를 고쳤다. 왜 그랬을까? 불의한 청지기가 임의대로 기름과 밀을 다른 비율로 탕감해 준 것일까? 만약 이것이 불의한 청지기 마음대로의 사문서 위조행위였다면, 이왕이면 밀도 50% 탕감해서 50말로 채무 증서를 고쳐 주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아니 어차피 해고당할 것이라면 아예 90%씩 탕감해서 기름 10말, 밀 10석으로 채무 증서를 고쳐 주었다면, 후에 채무자들에게 더 나은 대우를 받지 않았을까? 그러나 불의한 청지기가 탕감해준 기름과 밀의 탕감 비율은 청지기의 임의대로가 아니라, 주인이 불의하게 원금 속에 감추어둔 불의한 이자만큼 탕감해 준 것이다. 기름 100말은 주인이 채무자에게 빌려준 기름 50말에 이자율 100%인 기름 50말을 더해서 기름 100말 전체가 마치 원금인 것처럼 채무 증서에 기록한 것인데, 불의한 청지기는 교묘하게 율법을 어기고 원금에 숨겨 놓은 이자만큼 기름 50말을 채무자에게 탕감해 준 것이다. 또 밀 100석은 주인이 채무자에게 빌려준 밀 80석에 이자율 25%인 밀 20석을 더해서 밀 100석 전체가 마치 원금처럼 채무 증서에 기록한 것인데, 불의한 청지기는 교묘하게 율법을 어기고 원금에 숨겨 놓은 이자만큼 밀 20석을 채무자에게 탕감해 준 것이다(사실은 탕감해 준 기름 50말과 밀 20석은 주인이 불법으로 가로챈 것으로서, 원래는 채무자들의 것이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같은 동족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돈이나 곡식 등을 빌려주어도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되었다(레25:35-37/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그럼에도 악한 유대인 부자들은 가난한 유대인들에게 돈이나 곡식 등을 빌려줄 때는 원금에 이자를 더한 것을 마치 원금인 것처럼 채무 문서에 기록했다. 앞에서 설명한 것을 다시 언급하면, 눅16:6의 기름 100말은 실제로 빌려준 기름 50말에 이자 50말을 더해서, 기름 100말이 마치 원금인 것처럼 장부에 기록한 것이며, 눅16:7의 밀 100석은 실제로 빌려준 밀 80석에 이자 20석을 더해서, 밀 100석이 마치 원금인 것처럼 장부에 기록한 것이다.

당시 악한 유대인 부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처럼 장부를 꾸며서 합법적으로 가난한 채무자들에게 고리의 이자를 받아 챙겼으며, 이런 불의한 짓은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비일비재했던 일이었다. 예수님이 강도의 소굴이라고 책망하셨던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은밀한 고리대금업은 성행했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십일조, 성전세 등으로 현찰이 넘쳐났다. 성전 당국자들은 이것으로 원금에 이자를 더해 원금처럼 증서에 기재하는 수법으로 율법에 저촉되지 않게 합법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나오는 청지기의 주인과 같은 당시의 부자들은 고리대금업을 율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합법적으로 하기 위해, 이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유능한 청지기를 고액을 주고 채용했다. 당시에 문맹률이 98%를 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비유에 나오는 청지기는 숫자를 수학적으로 다루고, 그것을 장부에 기재할 수 있는 최고급 인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의한 청지기는 아마도 주인으로부터 고액 연봉을 받고, 율법을 교묘하게 어기는 주인의 불의한 짓에 하수인 노릇을 했을 것이다. 당시에 고리대금업을 하는 자들이 고액 연봉을 주고 청지기를 채용하는 까닭은 혹시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을 청지기에게 지우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불의하게 고리대금업을 하는 주인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고액 연봉의 청지기는 만약을 대비한 주인의 안전장치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쁜 주인은 자신의 채무 문서를 고쳐서 자신에게 막대한 금전적인 손해를 입힌 불의한 청지기를 왜 칭찬했을까? 일반적인 이해대로,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가 자신에게 입힌 재산상의 손해가 엄청났음에도 불구하고(불의한 청지기가 깎아준 기름 50말과 밀 20석의 가격은 족히 1000데나리온이 넘는다. 이는 노동자 한 사람의 3년 치 품삯보다 많은 액수이며, 이 또한 불의한 청지기가 깎아준 채무자의 채무액 중 일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비유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다른 채무자들도 그렇게 깎아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직 후의 자신의 미래를 지혜롭게 잘 준비한 것을 보고 감탄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나쁜 주인이 자신에게 엄청난 손해를 입힌 청지기를 그냥 칭찬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읽는 독자들은 눅16:5-7의 상황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듯이,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채무 문서를 위조하고 있는 범죄의 현장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의 명령에 따라 교묘하게 율법에 저촉되지 않게 이자를 숨겨서 작성한 불의한 채무 문서를 율법대로 바로 잡고 있는 현장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9절(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의한 재물”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9절에서 말씀하신 “불의한 재물”은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채무 문서를 위조해서 얻은 범죄로 인한 재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청지기의 주인이 채무 문서에 기록한 원금 속에 숨겨 놓은 불의한 이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채무 문서를 위조해서 얻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도와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인이 교묘하게 율법을 어기고 원금 속에 숨겨 놓은 이자에 해당하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도와주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불의한 짓을 해서 얻은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서 미래를 준비하라는 말이 아니라, 율법을 어긴 불의한 재물을 율법대로 바로 잡는 정당한 행위로 친구를 사귀어서, 해고 후의 미래를 준비하라는 말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문서를 위조해서 채무자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면, 채권자인 주인에 대하여 절대 약자인 채무자들이 불의한 청지기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 틀림없으며, 그렇게 되면, 이자를 탕감 받는 채무자들은 불의한 청지기의 범죄의 공범자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당장 원금을 갚아야하는 청천벽력 같은 일을 주인에게 통보받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채무자들이 불의한 청지기의 제안을 받아들인 까닭은 청지기의 호의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청지기가 원금 속에 불법적으로 숨긴 이자를 제하고 채무 증서에 원금만 기록한 것은 오히려 율법적이며, 아무런 하자 없으므로 채무자들이 청지기의 호의를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8절(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에서의 주인의 칭찬은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에 대해 긍정적인 감탄의 칭찬이 아니라,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그래서 자신의 피 같은 거액의 재산을 축낸 괘씸한 청지기를 감옥에 쳐 넣고 싶었지만, 만약 재판관에게 불의한 청지기를 고소해서 넘기면,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율법을 어긴 범죄가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의한 청지기의 주인의 칭찬은 율법을 어긴 자신의 범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자신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 들어서, 원금 속에 숨겨 놓은 불의한 이자를 채무자들에게 감해줌으로써, 주인이 자신을 고소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청지기의 놀라운 지혜에 기가 막혀서 어쩔 수 없는 감탄으로 칭찬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지혜 있게”로 번역된 부사 “φρονίμως”(프로니모스)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지혜”의 의미로 알고 있는 “σοφία”(소피아/wisdom)에서 파생된 부사가 아니다. 본문의 “φρονίμως”(프로니모스)는 성경에서 여기에만 등장하는 단어여서 본문에서의 정확한 쓰임새는 알 수 없지만, 다른 헬라어 문헌을 참고하면, “지혜롭게”(wisely) 보다는 “센스 있게”(sensibly), “사려 깊게”(thoughtfully) 등의 의미에 더 가까운 단어이다. 따라서 청지기에 대한 주인의 칭찬은 율법을 바로 잡는 방법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사려 깊은 센스에 대한 자포자기의 어쩔 수 없는 칭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의한 재물”이란 무엇인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16:9)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의한 재물”을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채무 문서를 불법으로 위조해서 채무자들에게 돌려준 삥땅친 재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쁜 짓을 해서 얻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불의한 명령을 한 것이 되고 만다. 만약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재물을 사용해서 친구를 사귀라는 교훈을 하시려고 했다면, “의로운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명령하셨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런 모순을 피하려고, 대부분의 주석들에서도 그렇듯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의한 재물은 나쁜 짓을 해서 얻은 재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보화와 대비되는 세상의 모든 재물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억지 해석을 한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어설픈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하나인 재물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지 않으며, 단지 재물을 사랑하는 것을 악한 것이라고 말할 뿐이기 때문이다(딤전6: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생각해 보라! 만약 본문의 “불의한 재물”이 세상의 모든 재물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이를 굳이 “불의한 재물”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평소대로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또는 “너희의 소유로 친구를 사귀라”(눅8:3/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의한 재물”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전제로 하는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의한 재물”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는 비유 속에 그 답이 있다.

먼저는 당시의 이자율을 염두에 둔다면, “불의한 재물”이란 6-8절에서 청지기가 탕감해 준 50말의 기름과 20석의 밀이 주인이 원금 속에 숨겨 놓은 불의한 이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 “불의한 재물”에서 “불의한”으로 번역된 “ἀδικίας”(아디카이스)의 의미가 “율법을 파괴한, 율법을 어긴, 불의한”(히8:12/내가 그들의 불의를/ἀδικίαις/아디키아이스/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등이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의한 재물”이란, 비유에서 나쁜 주인이 교묘히 율법을 어기면서 원금 속에 감추어 놓은 불의한 이자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이는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바탕으로 질문을 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도전을 주신 눅16:10-12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눅16:10-12)

9절의 “불의한 재물”이 11절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11절의 “불의한 재물”은 10절의 “지극히 작은 것”과 12절의 “남의 것”으로 묘사된다. 다시 말하면 10절의 “지극히 작은 것”과 11절의 “불의한 재물”, 그리고 12절의 “남의 것”은 모두 동일한 의미의 다른 표현이라는 말이다. 불의한 청지기가 친구를 사귀는데 사용한 9절의 “불의한 재물”은 11절에서 동일한 표현, 즉 “불의한 재물”로 묘사 되며, 10절에서는 “지극히 작은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불의한 청지기가 친구를 사귀는데 사용한 재물은 6-7절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결코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름 50말과 밀 20석을 합한 당시의 가격은 1000데나리온 이상으로, 노동자 한 사람이 자신의 품삯을 30년 이상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액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금 속에 숨겨 놓은 이자에 해당하는 불의한 재물은 주인에게는 지극히 큰 것이지만, 불의한 청지기에게는 자신의 소유가 아닌, “남의 것”(12절)이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것”(10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눅16:10-12의 예수님의 말씀은 “남의 것”, 그래서 “지극히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어긴 불의한 재물을 바로 잡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는 자들은, 율법을 어긴 불의한 재물이 자기의 것이라면, 결코 그것을 작게 여기지 않을 것이므로, 율법을 어긴 불의한 재물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큰 것”(참된 것)을 결코 맡기지 않을 것이므로,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참 소유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눅16:10-12에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히고 난 뒤에 13절에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교훈을 적나라하게 말씀하신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교훈은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가 아니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이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위의 예수님의 말씀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결론이며, 교훈이다.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물질에 집착하는 자들은 물질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들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런 상식적인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하시는 것일까? 이는 지금 제자들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주인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Lord)로 고백하며, 그리스도(메시아)로 믿고 있었다(막8:29/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 것이다. 가룟 유다까지도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진짜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자신들의 출세였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이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시고 왕으로 등극하실 때, 메시아 왕국에서 누가 가장 큰 자가 되어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놓고, 서로 쟁론하며 다투었던 것이다(막9:34/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이들은 실제로는 예수님을 자신들보다 덜 사랑하고(눅16:13에서 “미워하고”의 원래의 의미는 “덜 사랑하고”이며, 이는 셈어적인 표현이다), 자신들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와 교훈이 바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이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청지기의 주인은 부자로서,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에 의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로 인정받았으며, 주인도 자기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안식일을 잘 지켰을 것이며, 정기적으로 성전에 값비싼 제물과 예물을 드렸을 것이며, 십일조도 잘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원금 속에 불의한 이자를 숨겨서 채무 문서에 기록하는, 즉 율법을 어기는 불법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고처럼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므로,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가 틀림없으며,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자이다. 이는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탕자의 형에게도 동일한 설명이 가능하다. 탕자의 형은 속으로는 염소 새끼를 탐했지만, 겉으로는 아버지의 명을 섬겨 어긴 일이 없었기 때문에(눅15: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자신은 아버지를 잘 섬기는 자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므로 탕자의 형은 아버지가 아니라 염소 새끼를 주인으로 섬기는 자가 틀림없으며,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가 베푼 잔치 집 밖에 있었다.

반면에 탕자는 처음에는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요구할 만큼, 재물을 섬기는 배은망덕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가 찾아 왔을 때,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환대를 받으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아버지가 베푸신 잔치에 참여함으로써, 아버지를 섬기는 자로 변했다. 불의한 청지기도 처음에는 재물을 섬기는 주인의 청지기로서, 율법을 교묘하게 어기는 불의한 짓에 동참하며, 나쁜 주인이 주는 재물을 주인으로 섬겼다. 그러나 어느 날 자신이 해고당할 위기가 찾아왔을 때, 불의한 청지기는 율법을 교묘하게 어긴 주인의 불법 채무 증서를 하나님의 율법대로 바로 고침으로써,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로 변했다.

탕자와 불의한 청지기는 당시에 예수님께 나아온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의 얼굴이며, 탕자의 형과 불의한 청지기의 주인의 얼굴은 당시의 대제사장들, 제사장들,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민낯이었다. 이들의 종말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등장하는 나사로와 부자가 간 천국과 지옥으로 귀결되게 될 것이다(참고로 부언하면, 필자는 “탕자의 비유”의 속편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이며,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이 두 비유의 종결편이라고 생각한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교훈을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로 오해한 결정적인 이유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바탕으로 예수님은 10-12절까지에서 두 가지 질문으로 제자들에게 도전을 주시고, 친절하게도 13절에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교훈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교훈은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하라”가 아니라, 13절에 제시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가 명백하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누가는 14절(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에서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이 비유의 결론을 비웃었다고 첨언한다. 만약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교훈이 나쁜 짓을 한 불의한 재물로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는 것이었다면,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이 비유를 환영했을 것이다.

이렇게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교훈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사람들은 이 비유의 교훈을 “(불의한 짓을 해서라도)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일차적으로는 6-7절에 언급된 당시의 삶의 정황을 놓치므로, 불의한 재물의 의미를 범죄의 결과물로 오해했기 때문이며, 결정적으로는 아래 9절의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를 “영주할 처소”로 오역함으로써,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를 “영원한 천국”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16:9)

위 본문에서 “영주할 처소”로 번역된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는 그 동안 아무런 의심도 없이 “영원한 천국”으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에 본문 9절은 자연스럽게, 나쁜 짓을 해서 얻은 불의한 재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어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이런 논리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초점은 불의한 재물을 마련하는 나쁜 짓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는데 있다는 억지 설명을 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먼저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명령이 선하신 예수님의 성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완벽한 이야기꾼이시므로, 만약 예수님이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는 교훈을 주시려고 비유를 말씀하셨다면, 불의한 짓을 해서라도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는 스토리로 비유를 꾸미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정당한 행위를 소재로도 얼마든지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는 교훈을 주는 비유를 완벽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이해의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인간의 행위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교리가 성립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의한 재물로 도움을 받은 자들이 자신들을 도와준 자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영접할 수 있다는 논리도 성립된다. 그러나 “영원한 천국”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 그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이런 이유로 어떤 자들은 9절에서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는 “그들이” 다름 아닌 “천사들”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전후문맥을 보면, 여기서 “그들이”는 어디서 불쑥 튀어나온 천사들이 아니라. 불의한 재물로 도움을 받은 자들, 즉 인간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9절의 “영주할 처소”(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는 영원한 천국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다.

“영주할 처소”로 오역된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가 “영원한 천국”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이 단어 속에 있다. 이는 “처소”로 번역된 “σκηνάς”(스케나스)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사실이다. “σκηνάς”(스케나스)는 “장막, 천막, 집” 등의 의미를 가진 “σκηνή”(스케네)의 복수이다. 따라서 개역개정에서 “영주할 처소로”로 번역된 “εἰς τὰς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에이스 타스 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를 원문대로 바르게 직역하면 “끊임없이(without end, endless) 그 처소들 안으로”가 될 것이다. 여기서 “처소들” 앞에 정관사 “τὰς”(타스)가 있는 까닭은 앞에 언급된 “그들이” 살고 있는 “그”(τὰς/타스) “처소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천국”(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하나님의 나라(왕국)”(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바실레이아 투 데우), “하나님의 집”(οἶκος θεοῦ/오이코스 데우), “하나님의 장막”(σκήνωμα θεοῦ/스케노마 데우), “하나님의 처소”(σκηνή θεοῦ/스케네 데우)등, 영원한 천국을 의미하는 단어들은 “βασιλεία”(바실레이아), “οἶκος”(오이코스), “σκήνωμα”(스케노마), “σκηνή”(스케네) 등, 예외 없이 단수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영원한 천국”, 즉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주할 처소”로 번역된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에서 “처소”에 해당하는 “σκηνάς”(스케나스)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점에서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가 “영원한 천국”을 의미할 수는 결코 없다. 왜냐하면 “영원한 천국”은 복수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주할 처소로”로 번역된 “εἰς τὰς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에이스 타스 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9절의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나오는 4절(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의 “사람들이(그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에 대응하는 말이다. 4절의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δέξωνταί με εἰς τοὺς οἴκους αὐτῶν”(덱손타이 메 에이스 투스 오이쿠스 아우톤)이며, 이에 대응하는 9절의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δέξωνται ὑμᾶς εἰς τὰς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덱손타스 휘마스 타스 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이다. 이 두 문장에서 서로 다른 것은 인칭대명사 “나를”(με/메)과 “너희들”(ὑμᾶς/휘마스), 그리고 “집”(οἴκους/오이쿠스)과 “처소들”(σκηνάς/스케나스)이며(“οἴκους”와 “σκηνάς”는 동일한 의미이다), 9절의 문장에는 4절에 없는 “αἰωνίους”(아이오니우스)가 더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 문장의 차이는 비유 속의 대상과 실제의 대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 외에는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문장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로 번역된 “δέξωνται ὑμᾶς εἰς τὰς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덱손타스 휘마스 타스 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을 제대로 번역하면 “그들이 너희를 끊임없이 (자신들의) 그 처소들로 영접하리라”가 될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는 ‘내가 주인이 원금 속에 숨겨 놓은 불의한 재물로 채무자들을 도와주면, 내가 실업자가 되는 위기의 때에 그들이 자기 집으로 나를 영접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비유에서는 그 이후의 스토리가 없지만, 만약 있다면 아마도 불의한 청지기의 생각대로, 청지기의 도움 받은 채무자들이 실업자가 된 불의한 청지기를 성심성의를 다해 자기들의 처소들로 끊임없이 영접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스토리를 배경으로 제자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신 교훈이 바로 9절(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이다. 여기서 일차적인 교훈이라 함은 10-13절의 본 교훈 전에 부차적으로, 즉 지나가는 길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교훈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9절의 예수님의 일차적인 교훈은 ‘비유에서 불의한 청지기가 원금 속에 숨겨놓은 불의한 재물로 채무자들을 도와줌으로써, 불의한 청지기가 실업자가 되었을 때, 도움 받은 채무자들이 불의한 청지기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것처럼, 너희도 불의한 청지기처럼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너희들이 재물이 없어질, 즉 굶주릴 위기에 처할 때, 그들은 끊임없이(언제든지 마다하지 않고) 자신들의 처소들로 너희들을 영접하는 유익이 너희들에게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 세상의 삶에서도 상당한 유익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는 마5:24-26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한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4-26)

예수님은 본문 24절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한 일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형제와 화목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받지 않으실 것이므로,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나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화해의 중요성을 25-26절의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반사로 설명하신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서도 함께 길을 가는 자와의 원한 관계를 해결하지 않고 그냥 방치하면, 그 사람에게 고소를 당해 자칫 감옥에 들어갈 수 있다. 이때 상대방에게 빚진 모든 것을 갚지 않으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으므로, 상대방에게 고소를 당하기 전에 미리 모든 것을 다 갚고 상대방과 화해하는 것이 자칫 감옥에 갈 수 있는 미래의 위험한 일을 피하는 지혜로운 대처이다.

이렇게 세상사에서도 이웃과 화해하지 않고 살면, 자칫 상대방의 고소로 인해, 감옥에 들어가서 죽을 고생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 예물을 가지고 갈 때, 형제와 화해하지 않고 간다면, 이 얼마나 헛되고 위험한 일이 될 것인가?’가 24-26절의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25-26절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25절의 재판관은 하나님이고, 송사하는 자는 마귀이며, 관예는 천사이고, 옥은 지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엄청난 오해이다. 왜냐하면 본문에서는 빚진 것을 다 갚으면 옥에서 나올 수 있지만, 지옥은 한 번 가면 결코 다시 나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25-26절은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예를 들어서 형제와의 화목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지나가는 길에 일차적으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결과되는 세상에서의 유익을 말씀하시고 난 뒤에, 10-13절에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궁극적인 교훈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은 큰 것, 그리고 참된 것을 너희 것으로 맡기실 것이다”를 말씀하신 것이다.
 

글을 마치며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비유가 “탕자의 비유”의 속편임을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탕자의 비유에 이어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나오기 전에 누가는 눅16: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에서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의 표현으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탕자의 비유”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를 잘 섬기는 것처럼 꾸몄으나, 사실상 그의 주인은 염소새끼도 대변되는 재물이었다. 마찬가지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청지기의 주인은 율법에 어긋나지 않게 채무 장부를 꾸몄으나, 실상은 불의한 이자를 원금 속에 숨겨놓았다. 그러므로 불의한 청지기의 주인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처럼 보였을지라도 사실상 그의 주인은 원금에 숨겨놓은 불의한 이자로 대변되는 재물이었다. 이들은 모두 다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면서도 마치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처럼 위선을 떨었다. 반면에 탕자는 처음에는 아버지가 죽어야 가능한 자신의 상속분을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요구함으로써, 노골적으로 자신의 주인이 재물임을 드러냈으나, 위기가 찾아오자 아버지께 돌아와서 아버지가 자신의 주인임을 고백하며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여한다. 마찬가지로 불의한 청지기는 처음에는 악한 주인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채무 증서를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처럼 교묘하게 꾸미는 짓을 하며, 재물을 주인으로 섬겼으나, 위기가 왔을 때에, 원금 속에 숨겨 놓은 불의한 이자를 하나님의 율법에 맞게 채무자에게 돌려줌으로써, 다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긴다. 이것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으신 내용이다. 그러므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교훈은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라”가 아니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이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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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