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사가 나에게 유투브 동영상 두 편을 보냈다. ‘리얼 크리스천 1부’, ‘리얼 크리스천 2부’라는 제목의 두 개의 영상이었다. 미국 뉴저지의 신사도-행위구원론 교회라고 소문한 ‘사랑과진리교회’의 벤자민 오 목사가 김세윤, 권연경, 최갑종, 알리스터 맥그래스, 등과 인터뷰하는 내용의 영상이었다.필자는 한국 교회 구원론을 ‘구원파 구원론의 신학’이라는 김세윤의 주장에 대해서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리얼 크리스천 1부’의 도입 부분에서 김세윤 교수는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정죄한 스스로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의 대다수 교단의 목사들의 복음 선포가 사실 상 구원파 신학”이라는 주장으로 시작하였고, 그 뒤를 이은 ‘바울신학의 대표 연구자’라고 소개된 권연경 교수, 백석대학교 총장인 최갑종 교수도 유사한
필자는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라고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강조하기도 한다. 학생이 교과서와 참고도서 등 관련도서를 구입하는 것이 학습하는 사람의 중요한 준비 자세이고 항속적으로 공부하는데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에 근거한 것이도 하다. 어떤 주부가 1,000원 할인을 받기 위해서 3,000원의 교통비를 소요했다면, 그 주부는 2,000원의 손해를 본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 주부는 알뜰한 정신이 그 가정의 가계를 튼튼하게 한다. 숫자 지표가 아니라 공동체의 정신(mental)이 중요하다. 정신을 만드는 유일한 문화는 책이다. 미디어(드라마 등)로 형성시킨 정신은 현세적이고 임시적이고 소비적인 정신이다. 그러나 책으로 만들어진 지식은 책을 만드는 사람의 탁월한 정
앞에서 용어를 언급하면서 대표적인 퀴어 신학자들의 이름이 많이 언급되었다. 그 중의 대표적인 분들의 몇 가지 논의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르셀라 알트하우스-리드먼저, 아르헨티나 출신의 해방신학자로서 에딘버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마르셀라 알트하우스-리드(1952-2009)의 주장에 대해서 간단히 생각해 보자. 1952년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Rosario)에서 태어난 그녀는 호세 보니노(Jose Miguez Bonino)와 세베리노 크로아타(J. Severino Croatta) 같은 해방 신학자들과 함께 공부하였다(B. Th.). 아르헨티나 감리교 목사로 훈련받고 파울로 프레리의 “의식화” 방법을 더 연구하였으며, 브에노스 아이레스의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 안의 교회에서 이
많은 이단들과 조용기, 문희곤, 하용조 목사의 사역이 지닌 결정적인 문제는 행위구원론을 퍼뜨리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목숨 걸고 지켜온 ‘이신칭의’ 교리는 사라지고 다시 로마 가톨릭이 주장한 행위구원론이 한국교회를 뒤엎고 있다. 한국교회에서는 교리적으로 전혀 검증 되지도 않고, 심지어 명백히 문제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위가 선하다 하여 칭송되는 경우가 많다. 올바른 교리가 무너지고, 한국교회의 신학이 반펠라기안화되고 있기 때문이다.존경할만한 신앙인이면 그들이 교리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는다. 이들이 좋은 신앙인인지 아닌지를 그들의 행위를 보고 판단한다. 한국교회 설교 강단에서 외치는 이들에 대한 존경의 근거는 오직 ‘행위’이다. 특히 권세의 자리를 버리고 오지로 들어가 약한
앞의 글에서 대표적인 퀴어 신학자들의 이름이 많이 언급되었다. 그 중의 대표적인 분들의 몇 가지 논의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먼저, 아르헨티나 출신의 해방신학자로서 에딘버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마르셀라 알트하우스-리드(1952-2009)의 주장에 대해서 간단히 생각해 보자. 1952년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Rosario)에서 태어난 그녀는 호세 보니노(Jose Miguez Bonino)와 세베리노 크로아타(J. Severino Croatta) 같은 해방 신학자들과 함께 공부하였다(B. Th.). 아르헨티나 감리교 목사로 훈련받고 파울로 프레리의 “의식화” 방법을 더 연구하였으며, 브에노스 아이레스의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 안의 교회에서 이 방법을 적용하여 보고서는 후에 스코틀란드의 던디(D
1990년대 중반부터 ‘퀴어 신학’(queer theology)이라는 용어가 나타나고 있다. 그것에 대해 선구적인 주장을 했던 사람들로서, (친동성애적 논의의 문을 열어 이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며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동성애가 아니며 손님에 대한 호의적 접대(hospitality)를 하지 않은 것이라는 논의를 시작한, 1962년에 웰스 대성당의 Canon이 되었던 성공회 사제인) D. Sherwin Bailey (1910-84, 1955), (역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집단 강간(group rape)만이 그 죄임을 시사했던) Walter Brueggemann, (게이와 레즈비언을 교회가 수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지도력을 가지고 신앙 가운데서 활발하게 살 수 있도록 교회의 구조를 재편
이 모든 말을 듣고 난 후에 많은 분들은 그것은 우리가 가장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여 올 때 늘 힘쓰던 바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가 정상적인 교회라면 우리는 늘 그런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여 왔을 것이고, 그런 정상적 신앙생활에 근거해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모든 측면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잘 순종하는 가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물로 이 마지막 측면에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우리로 회개케 하고 더욱 더 주의 은혜에 근거해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에로 나아가도록 할 것이다.)그렇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그런 바른 길을 향해 나아 갈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3. 그런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모습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이와 같이 성령님께 철저히 의존해 가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 과연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 과연 영성 수련이나 영성 훈련과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일까? 성경은 그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일정한 방법을 지시해 준 일이 없다. 그런 것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에 근거해서 체계화한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말하는 것은 약간의 유익은 될 수 있으나, 문제는 다음과 같다. 1)그런 방법의 제시가 일종의 새로운 율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고, 2) 한 사람에게는 경건인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는
우리는 이미 지난 글들에서 오늘 날 우리 주변에서 사용되는 영성 개념에 대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우리가 피하여야 할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살폈다.2-2>그렇다면 이런 문제점을 드러내지 않는 진정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이들,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적 영성으로 충만한 이들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성령님으로 행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에 대한 시금석을 우선 다음 네 가지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1) 성령님의 힘으로 온전하고 구비된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된다. 즉,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잘 조화되어 나타나는 성령의 “한 열매”(κa'ρπος)를 내는 삶이다(갈 5:22, 23). 이 구절이
오늘날은 그야 말로 영성의 혼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계속 영성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 “영성”이라는 용어가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일단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가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은 뒤로 한 채 우리가 성경적으로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묘사해 보기로 하자.2. 우리가 드러내려고 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그렇다면 이런 문제점들에서 벗어나 우리가 '영성'이라는 용어를 가장 좋은 의미로 말할 때 우리가 의도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모든 토대에 대한 정지(整地)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과연 어떤 것이 '진정한 기독교적인 영성'이며, 그런 의
때로는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의 한 부분으로 영성 생활을 언급하는 일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서, “신학의 당파성이 아니라 보편성/구체성, 절대성이나 상대성이 아니라 다원성, 탈세속성이 아니라 세속성을 추구하며 홍정수 박사가 1988년 11월 29일 개원한 세계신학연구원을 1995년 5월 15일에 확대 개편한 신학과 목회 연구소”인 한국 기독교 연구소는 그러한 종교다원주의적인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영성 생활에 대한 많은 도서를 내고 강조하고 있다.이는 오늘 날 한국 사회에서도 “영성”이라는 말이 매우 다양한, 때로는 혼합주의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심상태 신부는 오늘날의 영성 운동의 과제의 하나로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신출귀몰 ‘전우치(田禹治, 14??년 ~ 15??년)’가 있었지만 조선을 바꾸지는 못했다. 많은 도전자들은 혁명을 하기도 했고, 반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동서고금에서 드러난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 Calamus Gladio Fortior 영,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우리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이라 했다. 문(文)을 숭상하여 무(武)를 천시할 때도 있었다.그러나 권력은 항상 무력(武力)에 근거했다. 그럼에도 무력은 시대를 아프게 했을 뿐 회복을 제공하지 못했다. 간혹 무력독재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인간존중이 결여된 수준으로 생각할 수 있다. 칼(刀)을 근거로 한 통치에는 칼잡이를 잡
1-2. 그러면 기독교와 관련된 이들이 말하는 “영성”만을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이들이 말하는 영성이라는 것을 다 제쳐 놓고,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복음주의권에서, 그리고 이 자리에서 우리가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방식과 의미이기도 하다.그러나 이 용어가 사용된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면 이것도 그렇게 단순히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영성”을 말하는 이들이 대개 이전 천주교 영성 사상가들이 말하던 바를 토대로 하고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들이 이 단어에 부여한 의미를 배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얼마나 많은 이들이 천주교의
요즈음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이나 교회가 소위 ‘영성’에 관심을 가지고 '영성 수련'이나 '영성 훈련'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 많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 나가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개인과 교회 전체가 노력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영성 개념이나 이로부터 유래하는 영성 수련이나 영성 훈련의 문제점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방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방법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낳지 않을 수 없다. 1. 오늘날 '영성' 개념의 문제점일반적으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은 요즈음 기독교계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지적으로부터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예를 들자면, 이미 오래 전에 프란시스 쉐이퍼 같은 분도 자신의 중요한 경
디모데전서가 바울의 글인가의 여부 셋째로, 이 말씀을 바울의 글로 믿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하자. 성경에 대해서 비평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디모데전서를 비롯한 목회서신이 바울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이 바울의 이름으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한 것이라고 한다.그러므로 진짜 바울은 남자와 여자의 모든 면에서의 평등을 주장하는 데, 이 위-바울(the “pseudo-Paul”)은 진짜 바울의 견해와 달리 여성의 사역을 제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디모데전서에서 말하는 것을 따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필자는 이 말씀을 바울 자신이 쓴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바른 해석이라고 여긴다. 본문 자체가 사도 바울이(딤전 1:1; 1:13; 2:7)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장 전계헌 목사) 제102회 총회기 제3차 총회실행위원회 회의에서 “총신비상사태와 관련한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를 작성해서 발표했다(17-33쪽).지난 4월 20일 총회관에서 열린 실행위원회 회의자료에 수록된 보고서의 작성에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조직신학, 주경신학, 선교신학, 실천신학 교수 7명이 참여했다. 그런데 이 글을 비평하려고 글을 보는 순간 패닉에 빠져 버렸다. 그것은 첫 어휘가 “총신대 김영우 총장은~”라는 문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첫째, “총신비상사태와 관련한 정이철의 신
“교회론은 어느 교파든지 교회든지 동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적인 교회론을 경계해야 한다. 신학적인 교회론은 그 시대의 사상과 현실적인 문제와 혼합되어 있다.”(하용조)하용조 목사는 교회론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하였다. 그런데 신학적 교회론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교회론이 있겠는가? 아마 성경적 교회론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신학적인 것은 시대적 사상이 혼합되어 있을 수 있으니, 성경적 교회론으로 가자는 것이다. 성경적 교회론의 모델로 사도행전적 교회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신학적인 것을 탈피한다고 자동적으로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 목사가 어떤 교회론과 예배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 파헤쳐 보자. 그가 입으로 어떤 말을 할지라
그렇다면, 둘째로, 이 금령은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 따른 1세기적 정황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주께서 오실 때까지의 상황을 지배하는 것인가? 만일에 1세기 정황에서의 이야기라면 이 말씀은 1세기 성도들에게는 구속력을 지니는 것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구속력이 없는 말씀인 것이 된다. 어떤 해석자들은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 숭배(the Artemis cult)의 중심지의 하나인데 이 종교에서 여성들의 주도권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적 형태의 유대적 기독교가 바울이 이 논의를 하는 역사적 맥락이라고 논의하기도 한다.그리츠는 이렇게 말한다: “아데미 숭배와 관련된 여성주의적 원리가 온전히 침투되어 있는 종교적 정황 가운데서 여성의 높아짐이나 우위 같은 태도가 있었다. 13절은
필자는 이전에 “바른믿음 대표 정이철 목사, 그는 누구일까?”라는 글을 에 기고했다. 그 글이 사이트에서 가장 많은 댓글이 나올 정도로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번 기회에 정이철 목사가 휘두르면서 한국교회를 흔들고 있는 신학의 칼의 성격을 정리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인터넷 매체인 을 사람들은 ‘신학과 이단비평 전문사이트’라고 한다. 이 사이트는 2014년 10월 1일, 그러니까 약 4년 전에 드라마틱하게 시작했고 지금까지 한국 교회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 오해일수도 있고, 공격일수도 있다. 아무튼 정이철 목사의 기사와 보도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정이철’ 자신뿐인 것 같다.필자는 “바른믿음 대표 정이철 목사, 그는 누구일
근자에 목회서신에서 11-12절에 대해서만큼 많이 다루어진 본문이 없을 것이며, 그 모든 논의들의 주장들은 너무 다양해서 과연 이 본문에 대한 역사적으로 바른 읽기가 무엇인지 의심할 정도라고 말하는 마운스는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두고 본문을 역사적으로 읽을 때 바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여성의 사역을 제한시키고 있으며, 그 근거를 창조의 순서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그래서 만일에 바울이 다른 곳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여성의 권위 있는 공식적 가르침을 허용한다면 그는 스스로 모순을 범하는 것이거나 우리가 본문인 11-14절을 오해한 것이 된다고 본문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읽기(historical reading of the text)를 제시한다.1)이 구절과 관련된 중요한 논점은 다음 세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