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는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 이라고 말하는 이런 말을 아주 쉽게 들을 수 있다. 신학에 대한 가르침과 개혁교회의 전통교육이라고 하는 캐터키즘을 가르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물론 현대교회가 도덕적으로 바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해서 지탄을 받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교묘한 사탄의 선전문구이다. 기독교는 “이것 아니면 저것”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는 “모두 다”의 문제이다.만약 우리 주변에서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리가 삶을 대적하며 삶이 교리를 대적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 팽배해 있는 교리를 혐오하는 사상이 지
2002년도 월드컵으로 대한민국 전체가 뜨거웠던 그 날이 생각난다. 신학대원 3학년 한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다. 총신대학원 3학년 4반 반장이었던 나는 서울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정현 목사는 총회의 헌법대로 편목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상식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오정현 목사가 3학년에 편목하였다는 말은 있었지만 그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1학기 시험을 앞두고 오정현 목사를 복도에서 한 번 보았다. 그런데 총신신학대학원 교수들은 오정현 목사를 과잉보호하듯이 그가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듯이 그를 자신의 연구실로 맞이 하여주었다. 그리고 오정현 목사는 편목 수업을 거치지 않고 강도사 시험도 보지 않았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루터는 “구원하는 믿음은 오직 살아 있고 의의 열매를 맺는 생명이 있는 믿음”이라고 하였다. 죄인이 의롭다고 함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그 믿음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2항은 루터의 가르침대로 “믿음은 다른 모든 구원의 은혜들과 함께 있으며 그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 라고 가르친다.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는다. 믿음으로 칭의를 받고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가? 세대주의자들 가운데 반율법주의적 견해를 가진 자들은 이 질문에 충분히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은 의롭다고 하는 것
그렇다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경은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24:44).정확하게 번역하면 “모세의 글들과 선지자들의 글들과 시편”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선지자들의 글이란 모세 오경과 시가서를 제외하고 모든 구약 성경을 선지서로 구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구약 성경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마귀는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성경으로 이끌지만 성령은 그리스도가 계시
종교개혁은 한마디로 말해 신학의 개혁이다. 이 신학의 개혁은 성경해석의 차이에 의해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작성한 내용을 보면 결국 성경에도 없는 신학을 로마교회가 일반성도들에게 왜곡하여 가르쳤고, 성도들은 그것이 마치 진리인양 믿고 쫓아 간 것이다. 교회가 말하면 모든 것이 다 옳다고 여겼다.이러한 현상은 현대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강단에서 목사가 하는 말이면 그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인양 믿고 있다. 물론 지식적으로 성경에 대하여 배운 성도들은 그렇게 믿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성도들은 목사가 강단에서 하는 말이면 다 '아멘'해야 복을 받는다고 믿는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나 오늘이나 다르지 않다.그렇다면 종교개혁이 오직 성경이
2016년 10월 31일은 세계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날이다. 한국교회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을 수많은 단체들을 통해 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을 기념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개혁교회 안에서 개혁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하고 부패한 마음은 잠시 동안 나두게 되면 금방이라도 인간적인 종교성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의 교회는 인간의 타락이라고 하는 문제에 늘 직면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존 헤세링크가 말했듯이 “개혁된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는 슬로건은 오늘날 현대교회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가 개혁에 대한 논의를 할 때 그 주된 내용은 형식적인
오늘날에는 감독이라는 직분이 교회에 없다. 그러나 예전의 감독들이 교회를 위해 자신들의 직분을 어떻게 감당하였는지에 대한 그 실제적인 내용들은 현대 교회의 목사와 장로와 집사로 임명 받은 사람들이 당연히 배우고 따라야할 신앙의 본이다.교회의 재산은 토지든 돈이든 전부 빈민을 위한 재산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 칼빈은 자신의 책 (기독교 강요 4권 4장)에서 고대교회의 모습 속에서 이미 감독들은 이것을 분명하게 지켰다고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감독과 집사들은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기 위해 임명이 된 것이 아니라 빈민들을 돕기 위해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악한 마음으로 교회 재산을 감추거나 낭비하는 배신행위를 저지른다면 그들은 살인죄를 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교회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