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교수는, “방언은 처음 체험한 이후 계속 변(발전)하며, 한 가지 방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언을 하게 된다”1)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자신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김동수 교수가 설명한 일련의 현상들이야말로 자신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들이기 때문이다.오순절주의자들이 받았다고 하는 방언의 은사는 인간이 노력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기묘한 소리내기’로서 인간의 노력에 따라 발전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한다. 또 개인의 창의력에 따라서 여러 가지 소리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그날 기분에 따라 소리가 들쭉날쭉 변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방언에는 고수도 있고 하수도 있으며, 상황에 따라 방언이 녹슬었다고 여기기도 하고, 성령
들어가는 말거짓방언자들은 고전14:2을 근거로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은사라고 주장한다. 만약 바울이 고전14:2에서 방언기도가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면, 방언기도야말로 최고의 은사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한갓 피조물이며 죄인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히 비밀을 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거짓방언자들의 주장대로, 한갓 피조물이며 죄인에 불과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방언의 은사만 받는다면, 방언기도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거짓방언자들은 방언기도를 하면서 정말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일까? 어떤 경우에도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없다. 고린도
거짓방언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근거로 자신들이 하는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기도라고 주장한다. 만약 바울도 이들처럼 방언기도를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썼다면, 방언하는 자야말로 놀라운 경지의 영적 고수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다니 말이다.그렇다면 거짓방언자들의 주장대로 고린도교회는 방언기도를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영적으로 고수였을까? 고린도교회는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영적인 고수인가?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그것도 인간의 언어가 아닌 하늘의 언어로, 그것도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 이창모 목사(제자들경배와 찬양교회 담임)김동수 교수는 롬8:26의 “성령의 탄식”을 방언기도라고 주장한다.1) 물론 이런 주장은 거의 모든 거짓방언자들의 믿음이다. 이들의 주장대로 롬8:26의 “성령의 탄식”이 정말로 방언기도일까? 결론부터 먼저 말한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둔갑시키기 위해 바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롬8:26의 “성령의 탄식”을 방언기도라고 우기고 있다. 조금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김 교수뿐만 아니라 방
고린도전서 14장 1-3절을 전후 문맥을 통해 분석해 보면, 2절의 방언 이야기는 바울의 의견이 아님을 알 수 있다.전후 문맥을 통한 분석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고 고린도 교회에 명령한다. 그러고 나서 2-3절에서는 1절에서 예언하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고, 4절에서는 2-3절에서 말한 이유를 요약해서 다시 말한다.헬라어 원문에서 2절은 접속사 ‘가르’(‘ga.r’, 왜냐하면-안타깝게도 한글 성경에는 반영되지 않았다)로 시작하고, 3절은 접속사 ‘데’(‘de.’, 그러나-다행스럽게도 이것은 한글 성경에 반영되었다)로 시작한다. 그래서 2-3절은, 1절의 이유로 제시하는 하나의 문장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 원문의 접속사를 살려서 1절과 2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도처에 성경을 인용하고 있으므로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 목사는 자신의 부활복음 브랜드를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기 위하여 성경을 왜곡, 변조를 일삼고 있으므로, 사실상 그의 부활복음에는 성경이 없다. 마치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붕어빵은 팥 앙꼬 때문에 달콤하기는 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 먹지만, 그럼에도 붕어빵은 모양은 붕어일지라도 결코 붕어는 아니며, 그러므로 그 속에도 붕어는 없다. 마찬가지로 김 목사의 부활복음은 모양은 복음인 것 같으나 실상은 복음이 아니며, 그러므로 그 안에는 달콤한 부활 앙꼬는 있어도 진짜 성경은 없다. 이렇게 김 목사가 성경을 왜곡, 변조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갈1:8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령이 “그의 뜻대로” 교회에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는 것과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 와서 성령의 은사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쓰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설명한다.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은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한참 은사 이야기를 하다가 잠깐 쉬어가는 마당(고전13장)에서 사랑 타령을 한 판 벌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고린도전서 13장은 독립적으로도 훌륭한 사랑의 찬가일 수는 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을 바울의 의도대로 읽으려면, 고린도전서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자신의 목회적 체험을 근거로 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설득하는 힘이 상당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부활복음에 귀를 기울이며 환호하고 기뻐하고 있다. 이제 그가 전하는 부활복음은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체험적으로 말하는 부활복음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처음 목회를 시작하며, 신학교에서 배운 십자가 복음을 붙들고 회개를 외치며 몸부림쳤던 5년의 허송세월을 보내고 ...(중략)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의 목회 실패의 원인이 십자가의 죽은 복음에 있음을 깨닫고 부활을 붙잡고 부활복음을 전했더니 자신의 목회 현장에서 사도행전에서 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춘천 한마음침례교회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다른 복음”들 중 가장 진화된 형태의 것으로 여겨진다. 금가루, 금이빨, 거짓방언 등은 십자가와 상관없는 것임을 비교적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지만, 김 목사의 “부활복음”은 자주자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표현되기 때문에, 이를 듣는 사람들은 전혀 의심 없이 “부활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쉽게 믿게 되기 때문이다.그러나 김 목사가 전하는 “부활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다른 복음이다. 왜 그런지는 그가 2013년 11월13일 대전의 '늘 사랑 교회'의 전도부흥회 첫날 설교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김성로 목사는 목회를 시작하면서 온갖 것을 다
바울은 고전14:27-28에서 통역의 은사를 사용해서 거짓방언을 분별해 교회에서 퇴출시키도록 고린도교회에 권고했다는 필자의 주장을 김동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바울은 고전 14:5에서 방언 통역의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언의 효과와 똑같은 것이다.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기에 듣는 이의 신앙을 북돋아 줄 수 있었듯이(고전 14:4), 방언 통역은 방언에 대한 통역이었기에 듣는 이에게 신앙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이 되었던 것이다. 또 이들의 주장은 만약 방언이 영의 기도라면, 하나님과 은밀한 기도인데 그것을 통역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과 은밀히 하는 기도의 내용을 알려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14-15에서 바울이 가정법을 써서 ‘방언으로 기도하다’라는 말을 쓴 것은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이창모)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김동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이것은 헬라어의 기초를 전혀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헬라어에서 가정법 구문이 꼭 현실과 반대되는 상상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본문에서 현재 가정법으로 쓰인 구문인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은 ‘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혹은 기도할 때 마다]’라는 뜻이다.(Gordon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rev. ed., 742).만약 본문에서 이 사람의 주장대로 가정법 구문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4-11절에서 설명한 성령의 은사들을 곧바로 12절-27절에서 몸의 지체 비유로 다시 설명한다. 바울이 몸의 지체 비유를 동원하는 까닭은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의 이해력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바울이 몸의 지체 비유를 통해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2-13).몸은 하나지만 몸의 지체들은 눈, 코, 입, 손, 발 등 다양하다. 그런데 몸의 다양한 지체들은 다 한 몸에 붙어 있다. 이렇게 몸과 지체
(제목 입력 공간의 한계로 이 글의 제목에서 '김동수 교수'라고 호칭하지 못했음을 독자들께서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른믿음 편집자) 오늘 전개되는 현대 교회의 변태적인 거짓 방언에 대한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먼저 독자들은 나와 김동수 교수가 주장한 다음의 내용을 먼저 파악하기 바란다. “고전 14:2,4에서 방언이 하나님께 말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울의 주장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다”(이창모)."이러한 주장은 바울이 전혀 말하지도 않은 방언에 대한 정의(외국어를 말하는 능력)에서 출발해서 이런 엉뚱한 해석을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반대하는 고린도교회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기록 당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4-7).바울은 4-6절에서 다양한 은사와 직임에 관여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바울이 여기서 삼위 하나님을 차례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고린도 교회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르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중복을 피하려는 문학적 습관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이유는 7절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함으로써, 성령이 “그의 뜻대로”(11절) 교회에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교회의 유익에 있음을
(기사의 제목에서 '김동수 교수', '김동수 목사' 등의 존칭이 누락된 것은 김동수 교수를 무시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제목이 짧아야만 화면에 다 나타나는 공간의 문제로 인한 상황입니다. 바른믿음은 바른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상대가 누구일지라도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는 것을 당연시하나, 그 방법은 언제나 정당하고 그리스도인 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어긋나는 글을 발견하면 언제든지 지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참 방언과 거짓 방언을 구별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글로사’(방언)의 복수형은 성령의 은사로서의 참 방언을, 단수형은 거짓 방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양자를 구별하고 있다”(이창모 목사).한국의 대표적인 거짓 방언 중독자이며 옹호자인 김동수
평택대학교 교수인 김동수 목사는 다음과 같이 옹알거리는 거짓 방언을 옹호했다.“바울이 말한 방언은 방언 기도가 아니라고? 이들의 주장의 요체는 바울이 소개한 방언은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방금 앞에서 말한 대로 바울은 분명히 방언이 기도라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다”라는 용어까지 사용한다(14:15).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근거로 바울이 말한 방언이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김동수)“바울은 분명히 방언이 기도라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다’라는 용어까지 사용한다”(14:15)는 김동수 교수의 주장은 그가 과연 정상정인 신학자인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전후문맥을 무시하고, 또한 고린도전서 14장 15절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 즉 어린아이 수준의 고린
현대의 옹알거리는 거짓방언 옹호자(이하 ‘방옹자’)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집중적으로 기술한 그 문제의 방언이 정상적인 기독교의 방언이었으나 신자들에 의해 남용되고 오용됨으로 인해 문제를 야기했을 뿐이라고 한다. 바울은 그 당시의 고린도 교회를 더럽혔던 그 방언을 성령으로부터 나타난 기독교의 정상적인 은사였다고 보았고, 또한 바울이 적극적으로 그 방언을 권장했다고 주장한다.만약 극렬한 방옹자들과 많은 현대 교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의 그 방언이 성령이 주시는 기독교의 방언이었다면 아마도 바울은 다른 문제들과 비슷한 비중을 할애하여 방언 문제를 다루었거나 어쩌면 더 가볍게 다루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이 고전 14장에서 이야기하는 그 방언이 정상적인 성령의 은사였다면 그것
김동수 목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옹앙거리는 소리현상을 방언이라고 옹호하였다. “바울과 누가가 방언에 대해서 말할 때 공통점은 이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행 2:4; 고전 12:7) 된 것이라는 것이다. 또 이것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말을 배우지 않은 것이었기에 이것이 외국어이든, 실제 언어가 아니든 자신은 그 말의 뜻을 모르고 했다는 것이다.그런데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더 방언을 많이 했다는 것을(고전 14:18) 바울이 외국어 구사 능력이 있어서 외국어를 더 많이 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또 바울은 우리가 성령의 은사로 부르는 것을 ‘성령의 나타남’(고전 12:7)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피아노를 잘 치거나, 운동을 잘 하거나 하는 은사와 같
방옹자(거짓방언을 옹호하는 자)들은 방언기도가 초대 교회를 부흥시킨 원동력이었다고 믿는다.1) 따라서 이들은 방언이 예루살렘 초대 교회 안에 풍성하게 있었으며, 그 후에도 부흥하는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2) 이들은 방언기도가 있는 곳에서는 교회가 부흥하고, 방언기도를 반대하거나 없는 곳에서는 교회가 쇠퇴한다고 주장하면서, 더 나아가 방언을 반대하는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위협까지 하고 있다.3)방옹자들의 이런 주장은 사실일까? 방언 현상이 기록된 있었던 사도행전의 본문들을 직접 살펴보면서 이들의 주장이 사실인지 살펴보자. 1. 사도행전 2:4-7절보혜사 성령이 임하셨던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주의 제자들은 본토 유대인들에게는 아람어로, 천하각국으로부터
언제나 무지하게 거짓 방언을 옹호하는 평택대학교의 신학과 교수 김동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부채도사 유형의 영성을 드러내는 온누리교회의 김하중 장로 등에게서 나타나는 일들이 사도행전 성령의 역사라고 극찬하는 등의 내용을 보고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박사급 박수무당'이라고 한다. 김동수 목사는 아무 의미가 없는 사이비 소리현상이 기독교의 신령한 영의 언어이고, 그것이야 말로 원래의 기독교의 방언이라고 우기는 항상 안타까운 행동을 계속 일삼는다. 최근 김동수는 이창모 목사의 저서 (밴드오부퓨리탄, 2014)에 대해서도 훼방하는 어리석은 글을 써서 또 많은 신실한 신자들의 눈살을 찌뿌리게 만들었다. 이에 이창모 목사는 아무런 바른 지식이 없으면서도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