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6 00:47 (화)
김효남 교수를 파면하거나 합동이 두 번 결의한 것을 취소해야 하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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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남 교수를 파면하거나 합동이 두 번 결의한 것을 취소해야 하는 상황
  • 정이철
  • 승인 2022.11.08 0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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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남 교수가 '총신원보' 279호 (2022년 10월 18일, 화)에 올린 글

(김효남 교수가 최근 총신원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김효남 교수의 장문의 글은 합동이 2021년, 2022년 총회에서 2회 연속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결의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성경적 진리라고 옹호하는 내용이다. 김효남 교수가 합동 총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단적인 사상을 정면으로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대담하게 총신원보를 통해 그리하였다. 이제 합동은 두 번 결의한 것을 스스로 취소하거나 김효남 교수를 파면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한 이해는 성경과 성경을 통해 세운 개혁신학의 체계에 대한 이해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단순히 구원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에서 뿌리를 둔 신학의 전반적인 체계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준 선악과의 열매를 먹는 것 관한 명령과 약속을 통하여 아담과 최초로 행위언약이 맺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행위언약이란 하나님과 이성적 피조물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성경에 행위언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개혁파 신학의 전통 안에 있던 이들의 대부분은 이 교리를 인정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개혁파 안에서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간간히 제기되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설령 행위언약을 부정하더라도 작금과 같이 모세가 율법을 주기 전에 율법이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지 않았다고 말하는 개혁파 신학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좌우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주장은 개혁파 전통 안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한국인 목회자들과 신학자 극히 일부가 개혁신학을 척도로 내세우면서, 행위언약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명령을 율법으로 보지도 않고, 아담의 영생도 그 율법의 준수 여부에 따라 조건부로 부여된 것이 아니라 율법과 상관없이 창조시에 이미 아담에게 (영생이)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역사적 개혁주의자들 가운데 거의 찾아 보기 힘든 주장으로서 개혁신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신신학입니다.

다시 행위언약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일반적으로 행위언약을 선악과의 열매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준 명령과 약속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깊이 연구한 많은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행위언약이 그 본질에 있어서 율법과 동일하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조건과 명령을 주시고 아담이 그 조건과 명령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약속과 벌을 주신 것을 행위언약이라고 하는데, 이 조건이라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뜻이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에 따른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 혹은 속성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은 무엇일까요? 사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원리를 만들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율법을 명문화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이 사람에게 다르고 저 사람에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또 이 시대에 다르고 저 시대에 다르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율법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속성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성적 피조물에 대하여 그 존재론적 차이 (창조주-피조물)로 인하여 필연적인 요구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그 속성상 모든 피조물의 경배를 받으셔야 하는 분이고 순종을 받아야 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성적 피조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가 죄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그 죄를 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은 피조물로서 그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의무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따로 명시적으로 말씀하시거나 명하지 않으셔도 본성상 존재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그에게 율법도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 율법 혹은 도덕법의 내용이란 하나님의 존재론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것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담이 이 율법, 혹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비롯된 의무에 대해 알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필연적으로 그에게 율법을 알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명시적으로 언약을 제안하시는 않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론적 차이와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에 따라 일정한 명령 혹은 율법이 주어졌고, 인간에게는 그것을 따라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령 혹은 율법을 어기게 되면, 인간에게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담 이후의 범죄한 후손인 노아, 아브람, 이삭, 야곱, 모세 등등의 사람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죄인을 부르셔서 의인으로 세우시는 분이 여호와, 우리 구주이십니다.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조건이 아니라, 주를 믿고 의지하며, 주의 말씀을 들으며 지키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율법이 아니라, 주의 사자에게서 나오는 복음이며,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계 2-3장).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악과를 통해서 맺은 행위언약과 아주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조건이 있고, 인간에게는 순종의 의무가 있으며, 그 행위 혹은 순종의 유무에 따라 상과 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를 창조의 법 (jus creationis), 자연언약 (foedus naturale), 혹은 행위언약(foedus operum)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통한 언약은 이 자연언약이 에덴이라는 특정한 상황에 명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행위언약에 대한 일종의 실정법(positive law)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명확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명령(명시적이든, 자연발생적이든), 곧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행위언약(율법)은 인간의 창조와 더불어 존재했으며, 이는 영원토록 그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이 변함없으며,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지위도 영원히 동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죄한 아담은 그 자체로 영생을 확보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상태는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었으며 (행위언약 혹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는 죽음과 그것이 의미하는 영원한 심판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도 역시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지위와 속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타락 이전의 아담이 이미 영생을 확보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영생을 확보했다면 영생해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던지 죄를 짓는 기다하더라도 심판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속성상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죄를 범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은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하듯이 타락 전 아담은 죄를 지을 수도,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posse peccare sive non peccare)였지,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 (non posse peccare)는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입어 영화된 택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지, 여전히 행위언약의 의무 아래 있던 아담에 있던 아담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능동적 순종을 반대하는 이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으므로 아담의 상태는 영생의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는 논리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완전히 잘못된 말입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는 그 자체로 완전하여 타락의 가능성, 곧 생명을 잃을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하나님의 드러난 의지 (voluntas signi 혹은 voluntas revelata)에 대해서 아담을 비롯한 피조물이 완전하게 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아담에게는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의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지요.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 곧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김으로 영생을 잃어버렸습니다. 또한 이는 자신의 본성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 곧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율법을 어긴 것도 됩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고, 또 역사적 개혁파 신학자들이 거의 고통으로 주장했던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확정해야 합니다. 첫째, 성경은 타락 이전에 행위언약 혹은 창조의 법이라고 불릴 수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둘째 이 명령에 대한 순종의 여부가 아담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인간의 영생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준수 여부에 필연적으로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서 세 번째 진리가 도출됩니다. 바로 아담은 결코 창조시에 영생을 이미 보유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의 순종 여부에 따라 영생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15.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은 대부분 아담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도록 시험받는 기간은 정해져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성경에 그 기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기간동안 아담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했고, 만약 아담이 선악과의 시험을 포함해서 자신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던 모든 율법을 지켰더라만 그 시험 기간이지 난 후에 아담은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를 통해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얻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이 동의했습니다. 다만 그 영생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스위스의 프란시스쿠스 튜레티누스(Franciscus Turretinus)와 같은 신학자들은 아담이 영생을 이 땅이 아닌 천국에서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잉글랜드의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과 같은 이들은 땅의 사람인 아담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연적인 능력으로 언약을 지켰으니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절대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 가능성이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들은 무죄한 아담이라도 아직 영생을 얻지 못했다는 것에는 거의 모두 동의했습니다. ​

그런데 이 아담이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이나 그의 죄책과 오염을 물려받은 인류는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야 할 뿐만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여 의를 얻어야 하는데, 이미 죄책을 가지고 있으며,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에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개입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만족시키는 방편을 생각해 내셨습니다. 바로 성자께서 성육신하셔서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과 택자가 은혜언약을 맺으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사실 의로우신 하나님과 불의한 죄인은 그 어떤 언약도 관계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언약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중보자가 되실까요? 바로 인간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필요했으나 실패했던 율법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필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율법을 어긴 결과로 주어진 죄책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중보자는 이 두 가지 일을 감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완전한 순종(perfect obedience, WCF 8.5),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WCF 11.1),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11.3)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음 만을 말한다면 왜 “순종과 죽음”이라고 구분해서 표현했겠습니까?

더 나아가 신앙고백은 8.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께서 그 직책(중보자와 보증인)을 가장 기쁜 마음으로 맡으셨으니, 이 직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율법 아래 태어나 그것을 완전히 성취하셨으며(능동적 순종), 그의 영혼에 직접적인 가장 참혹한 고통과 그의 육체에 가장 고통스러운 고난을 견디어 내었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장사되어 죽음의 권세아래 머물러 있었으나(수동적 순종)"

그렇다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왜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능동적 순종과 율법을 어긴 죄에 대한 형벌을 받는 수동적 순종이 모두 필요할까요? 다시 타락 전 아담에게로 가봅시다. 앞서 우리는 아담이 무죄한 상태에서도 영생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명령(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악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무죄한 자로 만드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구원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수동적 순종으로는 우리는 타락 전의 아담에게로 돌아갈 뿐, 영생을 위해서 필요한 의, 곧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 얻는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평생을 사시면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지키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전가해 주시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는 은혜언약의 중보자로서 은혜언약이 성립되기 위한 완전한 기초를 마련하셨습니다. 불의한 인간이라도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통해서 우리를 위한 완전한 의를 얻으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믿음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은혜언약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모든 의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언약입니다. 우리는 오직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두 번째 아담의 능동적 순종으로 이룬 의와 수동적 순종으로 이룬 죄사함이 우리에게 모두 전가되어 우리는 타락 전 첫번째 아담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그가 이루지 못했던 율법의 의를 얻어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능동적 순종교리에 대해서 반대하는 어떤 이들은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시킬 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에 나오는 능동적 순종에 대한 구절은 일부러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전제로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순히 죽음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최종적인 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말 소에는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깨달았던 구-프린스톤의 신학자 그레이샴 메이첸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없다면 소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진리를 모르는 이들은 능동적 순종을 비판함으로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냅니다.

능동적 순종으로 말미암는 의의 전가 교리는 칼빈 이후 개혁파 전통에 굳게 서 있는 교리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오히려 이 교리를 반대했던 이들이 정통교회에서 정죄당해 왔습니다. 우리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거의 모든 개혁신학자들은 이 교리를 사랑했고, 이 교리로 인하여 하나님께 더욱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교리는 우리를 두 배로 감사하게 만드는 은혜의 교리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은혜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율법 아래 나셨던(갈4:4,5) 그분은 평생에 걸쳐서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으니(히4: 15) 더욱 더 감사하지 않습니까! 성자께서 우리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그와 같이 헌신하시는 것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은혜입니까? 그러니 이처럼 복되고 은혜로운 교리를 어찌 버릴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 모두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두 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합시다.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실 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우리를 위하여 율법을 지키심으로 의를 이루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수고에 두 배로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립시다.

둘째, 우리는 이 복된 교리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거짓을 말하고 궤변으로 현혹하며 이 복된 교리를 부정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지킨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정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축소시키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를 방해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복된 교리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셋째, 이 교리를 자주 묵상합시다. 그리스도는 단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율법을 억지로 지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율법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고, 사실 그것은 그분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율법을 사랑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교리를 깊이 묵상하면 우리의 머리이자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의 복된 뜻이 도덕법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우리 역시 거룩의 신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강력한 동기를 발견하 될 것입니다.

넷째, 그리스도는 율법을 사랑하심으로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어기라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죄의 유혹을 물리치는 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하여 죄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지키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며 거룩한 신자의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에서 연구했다. 현재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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