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신학과 칼빈의 개혁신학의 차이 1

칼빈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스코틀랜드에서 발달한 장로교회와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에서 발달한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이다. 한국의 장로교회의 뿌리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이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신학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고, 몇 가지 제도의 차이가 있다. 장로교회에서는 목사와 장로가 종신직이나 개혁교회에서는 임기제이다.

칼빈의 종교개혁 울타리 속에서 등장했으나 실제로 칼빈의 개혁신학과 장로교회를 죽이면서 일어선 살모나 새끼 같은 또 다른 종교개혁 운동이 영국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장로교회를 죽이고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를 세웠던 청교도개혁운동이다. 

청교도들의 교회와 칼빈의 장로교회가 제도상으로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청교도들이 어떻게 칼빈의 종교개혁(장로교회)를 어떻게 말살하였는지 살펴보자. 칼빈의 장로교회(또는 개혁교회)는 교인들 가운데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이 당회, 노회, council 등의 기구를 구성하여 교회를 다스리게 한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회중교회는 (비록 목사, 장로를 세울지라도) 교회를 다스리는 일은 전 교인의 공동의 일이다. 일종의 '교회조합'인 셈이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 들어왔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소멸된 회중교회의 한국 명칭은 조합교회였다.

1564년 칼빈이 죽기 직전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은 회중교회 사상을 이단정죄하였다. 1562년 모렐리라는 인물이 회중주의를 주장하자 프랑스 개혁교회는 “교회에 혼란과 분열을 가져오는 사악한 교리” (양신혜 2020, 326)라고 규정하면서 모렐리를 파문하고 그의 책을 불태웠다. 또 그에게 동조한 목사들을 영구히 추방했다 (326).

그러므로 교회정치에 관하여 칼빈주의자들에게 회중교회는 이단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성자처럼 존경을 받는 모든 유명한 청교도들 99%가 회중교회 신학을 세운 자들이거나, 회중교회를 설립하여 목회하였던 자들이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정착한 초기 청교도 목회자들 전부가 회중교회 목사들이었다. 하바드, 예일대학도 회중교회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로 출발하였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도 모르면서 청교도들을 장로교회 조상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청교도운동의 역사적 흐름을 조망해 보자. 1580년대 말까지 청교도들의 목표는 장로교회 설립이었다. 그러나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은 칼빈의 장로교회가 잉글랜드 땅에 도입되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교회와 세속 정치를 일원화하지 않고 구분하는 장로교회 신학이 자신의 왕권 강화에 해가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임명한 국교회 주교들을 적극 우대하면서 국교회를 유일한 국가종교로 만들어 갔다.

1590년대 초가 되자 장로교회 도입을 주장하는 청교도들은 더 이상 잉글랜드 땅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소수의 청교도 목사들이 국교회 성직자 직을 버리고 스스로 잉글랜드 땅 안에서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그들이 세운 교회는 회중교회였고, 불행하게도 그들은 얼마 후에 사형당하였다 (원종천 1998, 128).

왜 국교회에서 이탈한 용감한 청교도들이 장로교회를 세우지 않고 이미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이 이단정죄한 회중교회를 세웠을까? 정부 권력의 비호를 받는 국교회 주교들의 횡포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소수의 고위직 주교들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국교회 신자들의 무기력하고 피동적인 신앙 자세에 대해 심각한 문제를 느꼈기 때문이다. 같은 국교회 성직자들 안에서도 더 높은 성직자가 다른 성직자들을 지배하는 엄격한 계급제도에 대해 많은 문제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개혁교회가 이단으로 정죄했건 말건 모든 교인들이 동등하게,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세를 보이면서 회중이 스스로 교회를 다스리는 회중교회 제도를 택했다. 이때부터 청교도들이 국교회를 이탈하여 교회를 세우면 어김없이 회중교회를 세웠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신앙의 자유를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네덜란드로 망명한 청교도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네덜란드에서 세운 교회도 모두 회중교회였다.

잉글랜드에 장로교회 설립을 꿈꾸었던 그 많은 청교도들이 있었으나 잉글랜드에 장로교회는 단 하나도 세워지지 못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의 비극이다. 만일 잉글랜드 의회가 국교회와의 내전을 승리로 종결한 후 계속 잉글랜드의 정치, 사회를 주도했다면, 잉글랜드에 무수한 장로교회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어려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대 장군 크롬웰과 그의 병사들 대부분이 장로교회를 좋아하지 않는 회중파 청교도들이었다. 그것이 비극의 원인이었다. 장로파 청교도들로 구성된 잉글랜드 의회가 다시는 그 땅에 종교로 인한 분쟁이 없도록 '하나의 교리를 믿는 하나의 교회'를 세우자면서 12명의 신학펀치가 강한 회중파들까지 모아 웨스트민서 신앙고백을 작성하였으나, 그것을 싫어한 회중파 군대가 판을 엎어 버렸다. 

대체 왜 국교회 군대를 물리친 후 잉글랜드에서 장로교회를 추구하는 청교도들이 일시에 사라졌을까? 그들은 국교회와의 전쟁을 시작했고 주도한 사람들인데, 왜 자신들이 원하는 장로교회를 세워보지 못하고 다 사라졌을까?

전쟁 후 곧 바로 의회와 크롬웰 사이에 주도권에 대한 다툼이 일어났다. 의회는 크롬웰을 견제하기 위해 그에게 군대를 몰고 멀리 웨일즈로 가라고 명령했다. 크롬웰은 군대를 몰고 길을 가다가 도중에 말머리를 돌렸다.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1647년 12월에 한번, 1648년 11월에 또 한번, 크롬웰은 두 번이나 잉글랜드 의회를 점령하여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장로파 청교도들을 완전히 말살(추방)하였다 (서요한 2016, 101-102).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잉글랜드에서는 영원히 장로교회가 나타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청교도운동은 잉글랜드에서 칼빈의 장로교회의 씨를 말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는 청교도 추종자들을 나는 보지 못했다. 청교도들의 개혁운동이 열열하게 전개되었던 잉글랜드 땅에서 영원히 장로교회가 말살되어 버린 것이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가르치는 청교도주의 교수들과 목사들은 얼마나 될까? 종교개혁 시대의 그 중요한 한 나라 잉글랜드에서 칼빈의 종교개혁의 열매인 장로교회의 씨를 말린 청교도들은 칼빈주의자들이었는가? 그들을 칼빈주의자들이라고 칭송하는 이상한 현실에 대해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로이드 존스는 회중파 청교도들이 장로파 청교도들을 말살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크롬웰과 그의 병사들 대부분은 독립파-회중교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장로교회 제도를 자신들에게 강요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LLoyd–Jones 1987, 225).

회중파 청교도들이 잉글랜드의 장로교회 씨만 밟아 죽인 것이 아니다. 이미 견고하게 자리잡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까지 실질적으로 말살하였다. 1648년 10월, 1650년 7월, 크롬웰 군대는 스코틀랜드를 두 번이나 정복하였다. 이유는 스크틀랜드 장로교회가 자신들이 싫어하는 임금을 다시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서요한 2016, 102). 그 시대의 상황에서 크롬웰 군대의 스코틀랜드 정복은 곧 장로교회 정복이었다. 이때 크롬웰 군대와 동행했던 군종목사는 그 유명한 청교도 신학의 황태가 존 오웬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칼빈주의 장로교단 교수들과 목회자들은 왜 이렇게 존 오웬을 존경하고 사랑할까? 

잉글랜드(웨일즈,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식민지 상태)와 스코틀랜드는 크롬웰을 수반으로 삼는 공화정 체제에 들어갔다. 당연히 회중교회의 신학과 신앙이 그 땅에서 우세해졌다. 다수의 잉글랜드 장로파 청교도들이 소수의 회중파들을 달래면서 애써 만들었던 웨신서(WCF, 1647)는 어디론가 쳐박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땅에서 회중교회 시대도 길지 못했다. 크롬웰이 죽고 내분이 일어났고, 결국 단두대에서 처형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왕으로 복위되었다. 찰스 2세는 국교회를 다시 국가종교로 복원하였고, 국교회를 제외한 모든 종파들은 불법종교로 규정하였다 (1662년). 결국 청교도운동은 피어나려고 했던 잉글랜드의 장로교회 씨를 말살하였고, 칼빈의 제자 존 낙스에 의해 세워지고 발전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까지 거반 죽여놓고 끝났다.

이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땅에서 오직 국교회만 인정되니 신대륙으로 이주는 더욱 증가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신자들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이주하는데 소극적이었다. 잉글랜드의 회중파 청교도들은 적극적으로 대서양을 건넜고, 그들은 신대륙에 이미 들어서 있는 회중교회에 합류하거나 세로운 회중교회를 세웠다. 로이드존스의 말을 들어보자.
 

 

“1662년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생활 터전에서 추방되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이 전에는 일종의 비국교도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공식적인 비국교도가 생겨난 것입니다. 청교도주의는 영국 국교회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영국 국교회에 속에 청교도주의를 심으려는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실질적으로 결론지어진 것은 1663년입니다. 그 동안 필그림 파더들은 지금의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 그들은 회중교회를 형성했습니다” (LLoyd–Jones 1987, 225).

회중파들에 비해 약 100년 늦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신자들의 신대륙 이주가 시작되었다. 신대륙이 이미 회중교회 지역이 되었을 때 장로교회 신자들도 대서양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대륙에서 출석할 장로교회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회중교회로 합류하였다. 나중에 장로교회가 생겨나도 장로교 목사가 없으니 회중교회 목회자 양성기관인 하버드대학(1636년), 예일대학(1701년) 출신 회중교회 목사를 청빙하였다. 이렇게 신대륙에서 회중교회 신학이 장로교회 신학으로 둔갑되었다. 

우리는 장로교회 신학의 뿌리라고 알려진 프린스턴대학(1746년, 1744년 뉴저지대학으로 출발)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학교가 태동하게 된 원인은 회중교회 목사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운동에 대한 심각한 이단시비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회중교회 신학교 하바드, 예일이 같은 회중교회 목사인 에드워즈와 결별하였다. 에드워즈를 따르는 학생(들)을 퇴학시키는 일도 발생했다. 인디언 선교사를 지망하는 에드워즈를 따르는 어떤 학생의 목사안수 문제 등으로 결국 새로운 학교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 학교가 지금의 프린스턴이다.

프린스턴의 초대학장은 회중교회 목사로서 장로교회를 담임했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크게 응원했던 조나단 디킨스 목사였다. 2대 학장은 에드워즈의 사위, 제자이며 에드워즈의 사상을 열렬하게 따랐던 회중교회 목사 아론 버였다. 3대 학장은 (비록 임기가 길지 못했으나) 신대륙의 회중교회 신학의 대명사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우리가 장로교회 신학의 요람이라고 알고 있는 프린스톤대학은 신대륙의 제1 회중교회 신학교 하버드, 제2 회중교회 신학교 예일의 뒤를 이은 제3의 회중교회 신학교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자들께서는 우리 장로교회의 신학의 중심 축이 20세기 초 자유주의로 인해 프린스톤에서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세미나리로 이동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회중교회 신학에서 탈피하여 진정한 칼빈주의 장로교회 신학을 세우려는 신학자들의 몸부림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그런 일이 없었으니 그런 말을 들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칼빈의 개혁신학(장로교회)을 죽이고 회중교회 신학을 세운 청교도운동을 장로교회 신앙운동으로 알고 살아오게 된 원인이다. 이것이 역사적인 진실이다. 대체 그 유명한 청교도들이 칼빈의 종교개혁(장로교회) 신학에 무슨 좋은 보탬이나 공헌을 했는가? 대체 청교도운동과 칼빈의 개혁운동이 어떤 면에서 상호작용하여 지상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씀의 반석 위에 세웠는가? 

다음에는 청교도들의 회중교회 신학이 어떻게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병들게 했는지, 그리고 미국와 한국의 장로교회 개혁신학이 왜 회중교회 신학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글을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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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신혜, 베자, 교회를 위해 길 위에 서다, 익투스, 2020.

원종천, 청교도 언약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

D. M. LLoyd - Jones, 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 The Bannerof Truth Trust, Carlisle, 1987.

서요한, 청교도 유산, 그리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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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