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열며지난 3월 29일 이인규 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춘천한마음교회(김성로 목사)에 대한 결론”이라는 글을 올렸을 때, 필자는 이인규 씨가 앞으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보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왜냐하면 그의 글 속에서 “부활이라는 사건이 속죄제사가 아니라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 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속죄제사를 충분히 이루었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원칙대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속죄사역은 완전하였다고 말하여야 한다.”는 등의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물론 이런 모습은 현재의 위기 상황을 만회하려는 일종의 트릭에 불과하다. (만약 “춘천한마음교회(김성로 목사)에 대한 결론”이 진정성이 있는 것
들어가며필자는 최근에 에 김한길 목사가 기고한 “정이철 목사의 이단적 주장에 대하여”라는 글을 읽었다. 그 내용은 약간의 손질은 했지만, 이인규 씨가 정이철 목사를 모함하기 위해 조작한 넋두리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더 이상 읽을 가치가 없는 저급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혹시 그런 글에도 휘둘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므로 반박 글을 써야겠다는 결심했다. 1. 정이철 목사의 “예수님도 자신의 십자가 피에 완전한 속죄 혜택을 받았다”에 대하여김한길 목사와 이인규 씨의 논리는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신데 어떻게 속죄의 해택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정이철 목사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무시한 이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이 무죄하시다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만큼은 개인의 덕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는가?"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14:4).오순절주의자들은 위의 본문을 근거로 방언기도는 ‘개인의 덕을 세우는 은사’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의 덕을 세우는 다른 모든 성령의 은사들과는 달리 방언의 은사만큼은 통역하면 교회를 위하는 은사가 되고, 통역 없이 개인적으로 기도하면 개인의 덕을 세우는 데 유익한 은사라는 것이다.1)과연 방언의 은사는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언(외국어)과 함께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영음)도 있는가? 아니면 한 가지 방언(영음)으로 통역자가 있을 때는 교회의 덕을 세울
이인규 씨는 ‘임헌원 목사와 정이철 목사에게 고하는 글’(9)에서 또 부활에 관한 여러 가지 글들을 주석에서 찾아 나열하고는, 자신이 나열한 글들에 언급된 부활을 정이철 목사님과 림훤원 목사님이 믿지 않는 것처럼 오도하고 있다. 그의 나쁜 버릇은 여전하며, 그의 무지도 여전한 것 같다. ‘임헌원 목사와 정이철 목사에게 고하는 글’(9)에서 그가 인용한 글 하나를 보자.“웨인 그루뎀은 미국 일리노이즈의 Trinity Evangelical School의 조직신학교수로서, 그의 저서가 우리나라에 여러권 발행되었다. 웨인 그루뎀도 루이스 벌콥과 마찬가지로 부활이 우리의 중생과 칭의를 보장하여 주며, 우리의 부활을 보장하여 준다고 말한다.- 부활 교리의 중요성a.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중생을 보
김동수 교수는, “방언은 처음 체험한 이후 계속 변(발전)하며, 한 가지 방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언을 하게 된다”1)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자신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김동수 교수가 설명한 일련의 현상들이야말로 자신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들이기 때문이다.오순절주의자들이 받았다고 하는 방언의 은사는 인간이 노력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기묘한 소리내기’로서 인간의 노력에 따라 발전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한다. 또 개인의 창의력에 따라서 여러 가지 소리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그날 기분에 따라 소리가 들쭉날쭉 변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방언에는 고수도 있고 하수도 있으며, 상황에 따라 방언이 녹슬었다고 여기기도 하고, 성령
글을 열며이인규 씨는 의 계속된 설명에도 불구하고, 끝내 김성로 목사의 잘못된 부활복음을 포기하지 않은 채, 또 그의 [무-물]에서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며, 복음의 핵심이다”와 “부활논쟁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로마서 1장 3-4절의 올바른 해석”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그는, 과거 ‘부활과 십자가는 모두가 구속적 사건이다‘의 제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활은 구속의 완성이다‘의 제목으로, 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번에는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며, 복음의 핵심이다”의 제목으로, 더욱 노골적으로 십자가를 빼버리고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이인규 씨가 이런 무지(여기서 이인규 씨가 무지하다는 말은 평균 이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실로 수준 이상의 대
들어가는 말거짓방언자들은 고전14:2을 근거로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은사라고 주장한다. 만약 바울이 고전14:2에서 방언기도가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면, 방언기도야말로 최고의 은사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한갓 피조물이며 죄인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히 비밀을 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거짓방언자들의 주장대로, 한갓 피조물이며 죄인에 불과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방언의 은사만 받는다면, 방언기도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거짓방언자들은 방언기도를 하면서 정말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일까? 어떤 경우에도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없다. 고린도
글을 열며필자는 이전의 글 "이인규, 여전히 무지하고 용감한 평신도 이단연구가"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인규 씨의 무지를 깨우쳐 주기 위하여 “구속”과 “구속적”의 차이를 가지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에도 이인규 씨는 "정이철 목사와 림헌원 목사에 대한 반박(5)"이란 제목의 글을 써서 “구속과 구속적”이 무엇이 다르냐고 하면서 시비를 걸었다. 물론 그의 시비는 또 한 번 자신의 신학적 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추태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이인규 씨는 "정이철 목사와 림헌원 목사에 대한 반박(5)"에서 이렇게 질문했다."정이철 목사는 현재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심각성과 위험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게다가 “구속”과 “구속적”이 다르다는 이상한 변명으로서, 자신의 문제점을
거짓방언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근거로 자신들이 하는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기도라고 주장한다. 만약 바울도 이들처럼 방언기도를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썼다면, 방언하는 자야말로 놀라운 경지의 영적 고수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다니 말이다.그렇다면 거짓방언자들의 주장대로 고린도교회는 방언기도를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영적으로 고수였을까? 고린도교회는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영적인 고수인가?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그것도 인간의 언어가 아닌 하늘의 언어로, 그것도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글을 열며이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비판한 것에 대해 이인규 씨가 반박문을 [무물]에 올렸다는 소식과 함께 필자에게 반박문 전문이 이-메일로 왔다. 솔직히 말하면, 메일을 열기 전에 필자의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아마도 이 두근거림은 그동안 이단들에게 상당한 타격을 준 그의 칼날이 얼마나 날카로운 지에 대한 일종의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그러나 기대만큼이나 실망이 컸다. “혹시나” 했지만, 결국 “역시나”였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그의 칼날이 무딘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무딘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에 실망 또한 클 수밖에 없었나보다. 의 어떤 독자의 댓글이 생각난다.“이인규 씨에게 공격 당한 이단들은 이단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정도 실력을 가진 사람
신천지와 같이 노골적으로 복음과 크게 다른 것을 가르치는 집단은 오히려 덜 위험하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도 쉽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단연구가들은 일반인들 중에서 조금 깨어있는 분들이라면 누가 의심하게 되는 빤한 이단집단들을 확실히 퇴치하기 앞장서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단사역자들의 나름 매우 귀하고 중요하다. 그런데 복음을 살짝 비틀어서 복음처럼 보이는 '다른 복음'(교후 11:4)을 가르치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고 같은 것은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그의 부활복음은 보통 사람들은 물론이고 비교적 분별력이 있다는 일부 이단전문가들도 보지 못할 정도로 성경적인 복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그래서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바람 같이 호응을 받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 이창모 목사(제자들경배와 찬양교회 담임)김동수 교수는 롬8:26의 “성령의 탄식”을 방언기도라고 주장한다.1) 물론 이런 주장은 거의 모든 거짓방언자들의 믿음이다. 이들의 주장대로 롬8:26의 “성령의 탄식”이 정말로 방언기도일까? 결론부터 먼저 말한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둔갑시키기 위해 바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롬8:26의 “성령의 탄식”을 방언기도라고 우기고 있다. 조금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김 교수뿐만 아니라 방
고린도전서 14장 1-3절을 전후 문맥을 통해 분석해 보면, 2절의 방언 이야기는 바울의 의견이 아님을 알 수 있다.전후 문맥을 통한 분석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고 고린도 교회에 명령한다. 그러고 나서 2-3절에서는 1절에서 예언하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고, 4절에서는 2-3절에서 말한 이유를 요약해서 다시 말한다.헬라어 원문에서 2절은 접속사 ‘가르’(‘ga.r’, 왜냐하면-안타깝게도 한글 성경에는 반영되지 않았다)로 시작하고, 3절은 접속사 ‘데’(‘de.’, 그러나-다행스럽게도 이것은 한글 성경에 반영되었다)로 시작한다. 그래서 2-3절은, 1절의 이유로 제시하는 하나의 문장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 원문의 접속사를 살려서 1절과 2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도처에 성경을 인용하고 있으므로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 목사는 자신의 부활복음 브랜드를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기 위하여 성경을 왜곡, 변조를 일삼고 있으므로, 사실상 그의 부활복음에는 성경이 없다. 마치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붕어빵은 팥 앙꼬 때문에 달콤하기는 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 먹지만, 그럼에도 붕어빵은 모양은 붕어일지라도 결코 붕어는 아니며, 그러므로 그 속에도 붕어는 없다. 마찬가지로 김 목사의 부활복음은 모양은 복음인 것 같으나 실상은 복음이 아니며, 그러므로 그 안에는 달콤한 부활 앙꼬는 있어도 진짜 성경은 없다. 이렇게 김 목사가 성경을 왜곡, 변조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갈1:8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령이 “그의 뜻대로” 교회에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는 것과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 와서 성령의 은사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쓰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설명한다.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은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한참 은사 이야기를 하다가 잠깐 쉬어가는 마당(고전13장)에서 사랑 타령을 한 판 벌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고린도전서 13장은 독립적으로도 훌륭한 사랑의 찬가일 수는 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을 바울의 의도대로 읽으려면, 고린도전서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자신의 목회적 체험을 근거로 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설득하는 힘이 상당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부활복음에 귀를 기울이며 환호하고 기뻐하고 있다. 이제 그가 전하는 부활복음은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체험적으로 말하는 부활복음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처음 목회를 시작하며, 신학교에서 배운 십자가 복음을 붙들고 회개를 외치며 몸부림쳤던 5년의 허송세월을 보내고 ...(중략)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의 목회 실패의 원인이 십자가의 죽은 복음에 있음을 깨닫고 부활을 붙잡고 부활복음을 전했더니 자신의 목회 현장에서 사도행전에서 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정이철 목사의 “한마음침례교회의 부활신앙 성경적인가요?”라는 기사의 하단에 평신도 이단연구자 이인규가 남긴 무례한 댓글의 내용을 보고서 참 마음이 상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매우 저급한 인신공격이고, 그 속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고, 동시에 이 시대의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지게 하는 ‘다른 복음’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었기 때문이다.진리의 본질을 흐려놓는 나쁜 테크닉“로렌스 콩과 콩히 목사에 대해서 구별도 못하는 한심한 정이철 목사는 그의 글에서 로렌스 콩을 비판하면서 사진은 콩히 목사의 사진을 실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되자 허둥지둥 사진을 바꾸는 웃을 수 없는 코메디까지 연출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밝혔듯이 이단연구가가 아니다. 이단연구가로서 자격이 없다.”이인규
춘천 한마음침례교회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다른 복음”들 중 가장 진화된 형태의 것으로 여겨진다. 금가루, 금이빨, 거짓방언 등은 십자가와 상관없는 것임을 비교적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지만, 김 목사의 “부활복음”은 자주자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표현되기 때문에, 이를 듣는 사람들은 전혀 의심 없이 “부활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쉽게 믿게 되기 때문이다.그러나 김 목사가 전하는 “부활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다른 복음이다. 왜 그런지는 그가 2013년 11월13일 대전의 '늘 사랑 교회'의 전도부흥회 첫날 설교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김성로 목사는 목회를 시작하면서 온갖 것을 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한 사단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이때부터 사단은 자신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여인의 후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만약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지면 거기서 사단의 머리가 깨어질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갈보리 언덕에 세워지지 않도록 말이다.바로가 히브리 여인이 낳은 아들들을 하수에 빠뜨리도록 명령한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통로를 막아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질 수 없게 하려는 사단의 음모였다. 바로가 홍해 앞 이스라엘에게 군대를 보낸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통로
바울은 고전14:27-28에서 통역의 은사를 사용해서 거짓방언을 분별해 교회에서 퇴출시키도록 고린도교회에 권고했다는 필자의 주장을 김동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바울은 고전 14:5에서 방언 통역의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언의 효과와 똑같은 것이다.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기에 듣는 이의 신앙을 북돋아 줄 수 있었듯이(고전 14:4), 방언 통역은 방언에 대한 통역이었기에 듣는 이에게 신앙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이 되었던 것이다. 또 이들의 주장은 만약 방언이 영의 기도라면, 하나님과 은밀한 기도인데 그것을 통역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과 은밀히 하는 기도의 내용을 알려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