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다. 1923년 스토틀랜드의 글래스고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그때까지 스코틀랜드의 자유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했다. 1924년 미국의 프린스톤 대학으로 유학하였고, 1927년 프린스톤에서 신학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29년 하지의 추천으로 모교 프린스톤에서 조직신학 강사가 되었고, 1930년 그레셤 메이첸의 도움으로 (1929년 필라델피아에 설립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신학 강사로 초빙되었고 이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가 되었다.

국내에 널리 알려진 저서로는 <존 머레이 조직신학>(크리스찬다이제스트), <존 머레이 구속>(복있는 사람), <칼빈의 성경관과 주권사상>(CLC) 등이 있고,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수 있는 <로마서 주석>이 있다.

머레이에 대한 한가지 이상한 현상이 한국 교회의 장로교회에 널리 퍼져 있다. 그것은 머레이를 칼빈을 왜곡하는 칼빈 이후의 칼빈주의자들의 비성경적인 신학을 계승하는 학자, 즉 후기 개혁주의자 또는 청교도신학 추종자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청교도신학과 반대되는 내용을 전개했던 머레이의 신학의 핵심들을 그의 직접적인 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오늘은 머레이의 칼빈주의 개혁신학과 청교도 개혁신학의 차이를 설명하는 네 번째 기사이다. 1-2번, 3번 글을 보지 못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참조>
"존 머레이의 행위언약, 능동적 순종과 대비되는 '하나님의 경륜' '온전한 순종'"(1,2번)

"존 머레이의 범죄 없으면 죽음 없도록 창조된 아담"(3번)

 

4. '율법의 의'가 아니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칼빈 이후에 형성된 청교도 개혁신학(회중교회 신학)을 장로교회의 칼빈주의 개혁신학과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을 부정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근거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정한다. 장로교회 속에 섞여 있는 회중교회 신학자들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근거라고 말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3,24).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1).

장로교회 속에 섞여 있는 회중교회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왜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라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까? 처음 아담에 대한 신학에서 칼빈과 길을 달리하고 대신 청교도주의의 (아버지) 윌리엄 퍼킨스의 신학을 따랐기 때문이다.

칼빈은 처음 아담을 하나님이 이미 영생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사람으로 보았다. 칼빈은 아담이 모든 귀한 복과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처럼 대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반역죄를 범하여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았을 때에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으며, 받은 축복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며 적어도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강요, 2.2.1).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 사람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강요, 2.1.4).

“그러나 그 후로 야심과 교만이 배은망덕과 함께 생겨났으니, 아담은 받은 것 이상을 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신 그 위대하고 풍성한 은혜를 파렴치하게 경멸했기 때문이다. 흙의 아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도 또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지 않는 것을 사소한 일로 보았으니 이 얼마나 해괴하고 흉악한 태도였는가!” (기독교강요, 2.1.4).

“아담이 그의 창조주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 그에게 영적 생명이 되었던 것과 같이, 창조주에게서 멀어진 것은 곧 영혼의 죽음을 말한다. 아담이 하늘과 땅의 전체적인 자연 질서에 위배했을 때, 그 반역으로 인해서 인류를 파멸에 다다르게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독교강요, 2.1.5).

“첫째 종류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영생의 보증으로서 생명나무를 주시고 그 열매를 먹는 동안은 영생을 확신할 수 있게 하셨다(창 2:9, 3:22). 또 노아 그 후손들을 위해서 무지개를 두시고 홍수로 땅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표를 삼으셨다(창 9:13-16) 아담과 노아는 이런 것을 성물로 생각했다. 그 자체로서는 영생을 줄 수 없는 생명나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었다는 것이 아니며, 반대쪽에 있는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에 불과한 무지개가 홍수를 막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생명나무와 무지개에 표징을 새겨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증명과 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강요, 4.14.18).

칼빈은 특히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에게 이미 주신 영생을 그가 계속 확인하도록 생명나무를 주셨다고 가르쳤다. 생명나무를 통해 아담에게 영생을 공급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주신 영생에 대해 아담이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감사하도록 생명나무를 신약 교회의 성찬과 같은 용도로 주셨다고 보았다.

칼빈처럼 처음 아담을 이해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방식은 너무도 분명하다.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한 죗값을 대신 갚으시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방식이다. 실제로 성경은 아담과 달리 항상 거룩하고 순종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반역한 죗값을 갚으심으로 구원을 주셨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하나님이 그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3: 25,26).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그러나 1590년대 초에 행위언약 신학을 만든 청교도 개혁주의의 아버지 윌리엄 퍼킨스는 처음 아담을 칼빈과 전혀 다르게 보았다. 그는 처음 아담을 자기의 노력으로 영생을 스스로 획득했어야 할 사람으로 보았다. 퍼킨스의 말을 보자.

“하나님의 언약은 어떤 조건하에서 영생을 얻는 것에 관한 인간과의 계약이다. 이 언약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약속과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시는 약속은 인간이 어떤 조건을 이행하면 당신은 그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맹세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하는 약속은 그가 하나님께 충성을 서약하고 그들 사이의 조건을 이행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Perkins 1626, 1:32; 원종천 1998, 48).

“행위언약은 완전 순종을 조건으로 만들어진 언약이고, 이 조건은 윤리법으로 표현된다. 윤리법은 인간에게 그의 본질과 행동에서 완전한 순종을 명령하는 하나님 말씀의 부분이고, 그 외에는 어떤 것도 금한다 ... 율법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순종을 요구하는 법과 그리고 순종과 결합되어 있는 조건이다. 그 조건은 율법을 완성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이고,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이다. 십계명은 율법의 축소판이요 행위언약이다” (Perkins 1626, 1:32; 원종천 1998, 48).

웨신서의 행위언약은 퍼킨스가 주장했던 내용의 반복이다. 퍼킨스가 행위언약이라는 명칭으로 체계화시킨 이 행위언약 이론이 전체 영국에 확산되었고, 50년 후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학자들에게 채택되었다. 웨신서의 대부분의 내용은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을 잘 반영하고 있으나, 처음 아담의 영생 문제와 타락에 대한 내용은 회중교회의 신학의 아버지 퍼킨스가 체계화시킨 이론이다.

어떤 사람들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신학자들도 그 이론에 동의했으므로 그것이 칼빈주의 신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칼빈주의 신학은 칼빈으로부터 시작된 신학이지 퍼킨스로부터 시작된 신학이 아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신학자들이 잘못된 퍼킨스의 신학에 영향받은 것이라고 해야 맞다. 칼빈은 결고 퍼킨스처럼 처음 아담이 스스로의 행위(율법준수)로 영생을 얻도록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보지 않았다.

퍼킨스의 아담 신학을 채용하면, 그리스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셔야 한다. 하나는 아담이 지키지 못한 율법을 대신 준수하는 것(능동적 순종)이고, 또 하나는 아담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해결하시는 것(수동적 순종)이다. 퍼킨스의 회중교회 신학(청교도 개혁주의)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죄를 사하여 주시고, 생전의 율법준수의 공덕으로 천국영생을 누릴 수 있는 의(자격)을 얻어 우리에게 전가하셨다고 주장한다.

(고)박형룡, 정승원(현,총신신대원장), 김효남 교수(총신신대원, 역사신학) 등 회중교회 신학과 장로교회 신학의 차이를 모르는 분들은 아무렇지 않게 타락한 아담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으로는 천국영생을 누릴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박형룡은 벌코프를 인용하면서 ‘최종으로 그리스도가 만일 사람에게 부과된 형벌을 받으셨을 뿐이면 그의 사역의 열매를 나누어 가진 자들은 아담이 타락되기 전에 있던 바로 그곳에 남아 있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즉 아담의 타락을 치유한 수동적 순종만 있었다면 우리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에 놓이게 되고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과 모세 율법과 도덕적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할 의무가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는 말이다” (총신신대원장 정승원 교수. “죽산 박형룡의 온전한(holistic) 순종”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악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무죄한 자로 만드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구원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수동적 순종으로는 우리는 타락 전의 아담에게로 돌아갈 뿐, 영생을 위해서 필요한 의, 곧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 얻는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평생을 사시면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지키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전가해 주시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김효남 교수. 총신원보에 올린 글의 일부).

정승원 교수는 (고)박형룡의 글을 인용하면서 타락한 아담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김효남 교수의 ‘타락 전의 아담에게로 돌아갈 뿐’이라는 말도 같은 주장이다. 타락 전의 아담도 율법준수를 통해 얻어지는 율법의 의를 스스로 구비했어야 천국 영생을 누릴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회중교회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즉 청교도 개혁주의자들은 영생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죄용서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한다. 천국 영생을 누리게 해 주는 적극적인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한다. 죄용서 이상의 뭔가가 더 있어야 천국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이들의 생각이 반드시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가 죄용서 받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해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고 죄용서 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게 된다고 한다. 특히 고리도후서 5:2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여 우리의 죄를 없애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가지게 만들었다고 했다. 회중교회 신학자들(청교도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천국 영생을 누리게하는 적극적인 요인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지목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얻으신 율법의 의를 우리가 천국 영생을 누리게하는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요소라고 하니 심각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천국 영생을 선물해주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칼빈주의 개혁신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어 죄용서 받음과 함께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장로교회(칼빈주의 개혁신학) 신학은 죄용서 받음과 함께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곧 우리가 천국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의 말을 보자.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심을 간단히 말하면, 신비로운 연합을 우리는 최고로 중요시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유자가 되심으로써 그가 받은 선물을 우리도 나눠가지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옷 입으며 그의 몸에 접붙여지기 때문에, 간단히 말해서 그가 우리를 자기와 하나로 만드시기 때문에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기독교강요, 3.11.10).

“그러므로 사도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다시 받게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원수라고 가르친다(롬 5:8-10). 그래서 주께서 받아들여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신 사람은 주께서 의롭다 하신다고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지 않고는 자신의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거나 자신과 결합시키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일이 죄의 용서로써 이루어진다고 부언한다” (기독교강요, 3.11.21).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죄용서를 주시고, 또 자기를 우리에게 연합시킴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셨다고 했다. 칼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는 원인은 그리스도와 하나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한 의가 되셨다고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의를 위하여 자신의 죽음과 순종을 우리에게 전가해 주심으로써 우리 죄를 속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용인되었음을 의미한다. 믿음의 의는 죄의 사면과 무조건적인 받아주심에 있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두 가지를 모두 받는다” (칼빈의 고전 1:30절 주석).

칼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전가받은 의는 그리스도가 율법준수로 얻었다는 율법의 의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본래의 의, 즉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의라고 설명했다.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의 본래의 의가 전가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의를 주시려고 성육신하셨다. 그러므로 행위언약-능동적 순종을 거부하고 죄용서-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믿는 칼빈주의 개혁주의자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한다. 반대로 율법의 의의 전가를 말하는 회중교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를 강조한다. 머레이는 행위언약-능동적 순종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칭의를 설명했다. 머레이의 말을 보자.

“이것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오는 필수 불가결한 것들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참여자가 아니고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과 동일시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는 희석되고 손상되어 위로와 확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의미성과 유효성을 결여하게 될 것이다” (존 머레이, 조직신학 2 (박문재 역), 225).

머레이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의, 즉 창조주 하나님의 성육신자의 본질적 의에 참여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그리스도가 율법준수하여 얻으신 율법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보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와 연합하여 이러한 의가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의의 수혜자가 될 뿐만 아니라 이 의의 참여자가 되고 실제적으로 이 의에 의하여 판단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와 동일시되어 죄를 알지도 못하면서 죄인으로 취급받았듯이, 전적으로 불경건하고 의를 알지도 못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와 동일시되어 하나님의 의가 된다” (존 머레이, 조직신학 2 (박문재 역), 225).

머레이는 그리스도가 우리 죄인들과 동일시되어 죽으시었으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함께 가진 사람으로 여겨져서 구원을 얻는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다 (소제목). ... 이 의는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면 율법의 의도 아니고 계시된 의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라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아마도 ‘하나님의 의’라는 말에 의해 가장 적절하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존 머레이, 조직신학 2 (박문재 역), 223).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이며 순종이다 (소제목). 로마서 5:17, 18, 19. ...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매개되는 의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일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또 한편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수여 또는 전가에 의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비록 인성 안에서 이루어진 순종으로 이루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특질과 특성을 가진 ‘하나님의 의’이다” (존 머레이, 조직신학 2 (박문재 역), 224).

머레이는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의를 전가받아 우리도 의인이 된다는 청교도 개혁주의 칭의신학과 다른 방식으로, 즉 칼빈의 방식으로 칭의를 설명했다. 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로 죽은 자기 백성들의 죗값을 대신 갚으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후 자기를 우리에게 연합시켜 자기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했다고 설명했다.

(다음 마지막 5회가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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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ins, William. 1626. The Works of William Perkins. 1 vol. London: John Legatt.

정승원, “죽산 박형룡의 온전한(holistic) 순종”. 죽산신학회 (20225).

김효남,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왜 성경적이며, 필연적인가?”. 총신원보, 279(20221018).

존 칼빈, 고린도전서 주석

존 칼빈, 기독교강요

원종천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 대한기독교서회. 2018.

존 머레이조직신학 2 (박문재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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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