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년경 리용 교회를 담임했던 이레네우스 주교는 그의 저서 《이단 반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오늘날 이단을 전수하는 자들의 관점을 게시하고...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고 진실과 어긋나는지를 보이고자 한다...이 책을 읽은 자들은..,지인들이 그러한 광기와 그리스도에 대한 불경의 나락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라.”이레네우스가 이단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한 책들 중 진리복음서와 요한외경이 포함된 것은 사실이다. 4세기 이후 기독교가 공식 종교로 인정되면서 이단으로 탄핵 받은 서적의 소유는 범죄 행위로 간주되었고 그러한 서적은 불태워졌다. 이 기독교는 ‘그노시스파(영지주의)’라고 불린다. 이는 보통 “지식”이라 번역되는 그리스어 그노시스에서 유래했다. 궁극적 현실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
인간의 탐욕이 영적 진보와 훈련에 추가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기도는 대표적인 영적 훈련이다. 영적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순수해야 한다. 인간적인 수단을 첨가시키는 것은 육적이고 영적이지 않다. 육적인 수단의 대표는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은 말과 외형은 매우 경건하지만, 내면은 불신으로 가득 차있어 하나님 앞에 악하고 게으른 유형이다.거룩한 기도에 인간의 탐욕이 침투했는데, 그것은 ‘많은 시간의 기도’를 원하는 것이다. 많은 시간의 기도를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인지하지 않는 인간의 독단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많은 시간을 기도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거룩하고 정결하라고 명령하신다.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1. 영지주의란 무엇인가?성경을 객관적, 지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포기했을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신비주의적 신앙이다. 이런 신앙을 ‘영지주의’로 볼 수 있다. 영지주의는 모든 이단들 중 가장 먼저 등장한 이단이며, 핵심적이고 모든 이단들의 자양분의 역할을 한다.영지주의는 타락한 인간의 본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사에서 뿐 아니라 신약 성경, 심지어 구약 성경에서도 영지주의는 등장한다. 영지주의는 신약 성경에 직접 언급되어 있으며 교회사가 형성되는 초창기에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가장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 이단이다. 이런 뿌리를 가진 영지주의는 인류 역사에 사라진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지금도 각 나라와 교회마다 영지주의에 영향 받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영지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그리스도인도 ‘많은 기도 시간’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에 명시적으로 ‘많은 말’이 기도 응답과 관계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를 ‘중언부언’이라고 제시했다.이방인이 하는 ‘중언부언’(do not keep on babbling like pagans. NIV)에는 ‘기도’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헬라어 ‘βατταλογήσητε’는 1회 등장하는 단어로, KJV는 ‘반복(repetition)’으로 제시했고, NIV는 ‘옹알이(babbling)’로 제시했다. 우리는 쉽게 ‘반복’하는 행동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NIV에서 ‘옹알이’라는 개념으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2:1)그리스도인이 형제와 이웃, 그리고 교회와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행위가 ‘중보기도’는 아니다. 기독교에서 ‘중보(仲保, mediation)’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신 ‘중보자(仲保者, the Mediator)’,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천상 통치에 적용하는 유일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이웃을 위한 기도를 ‘도고(禱告, intercession)’라고 했다. ‘도고’라는 단어는 중국어를 차용한 단어이다. ‘중보’라는 단어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1970년대 미국 신사도 운동가 피터 와그너의 ‘intercession’을 한국 교회가 ‘중보기도’로 정착해서 사용하는 단어이다. ‘중보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는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형성되었다. 오순절주의는 1세기 예루살렘 오순절(사도행전 2장)에 임한 성령의 한 현상인 ‘방언’을 성령 세례의 표로 주장하는 신학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은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하는 기능을 했는데, 오순절주의에서는 방언을 개인적인 ‘성령세례의 증표’로 세웠다. 방언은 오순절주의의 기본이고 다른 복음주의 교회와 구분할 수 있는 표식이다. 성도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오순절주의는 방언을 추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성령세례와 방언에서 오순절주의는 ‘방언’ 사모를 추구한다. 방언이 임하지 않으면 성령세례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1898년 칸사스의 토페카(Topeka)에서 감리교 목사 챨스 파함(Charles Parham.
대 그레고리로부터 샤를마뉴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방 교회는 신학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신학적으로 유력했던 지방은 회교도들에게 정복을 당하였으며, 강력한 희랍 철학은 동방 민족의 세력에 밀려나게 되었다.이제 신학은 교리적 배경이 없는 북쪽 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신학이란 단지 과거의 유산 정도로만 여겨지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샤를마뉴는 국가뿐 아니라 교회도 지배하였다. 교회의 예배, 훈련뿐만 아니라 교리 문제 등까지 간섭하였다. 그의 판단은 실천적인 것, 실용적인 것이냐?가 기준이 되었다.신학적 암흑의 시대에 교회는 어느새 반펠라기안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신학의 중요성을 모르고, 실천적인 것, 실용적인 것을 강조하는 환경은 반펠라기안이 성장하는 좋은 토양이다. 반펠라기안 저술은 중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묻는 제자들을 향해서 답하지 않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말씀했다."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18)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이해하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제자들(교회)이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를 증인하게 될 것이다. 1) 권능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권능을 받는 것이다. 2) 권능을 받아 행하는 것은 예수를 증인하는 것이다.‘증인’을 ‘증거’, ‘증언’으로 이해한다. ‘증인’은 ‘마르투스’인데 ‘순교자’로 의미가 전이 되었다. 예수를 증인(마르투스)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서철원 박사는 2016년 11월 예장 합동 서광주 노회 교육부가 주관하는 세미나에서 한국 교회의 후학들과 후배 목사들의 마음에 길이 기억될 개혁주의 신학의 주옥같은 내용들과 복음적 설교에 관한 지극히 기본적이면서도 성경의 핵심을 관통하는 보석 같은 내용들을 전수하는 시간을 가졌다.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강의하는 도중에 서철원 박사는 갑자기 춘천한마음침레교회 김성로 목사가 지난 15년 동안 전파한 부활복음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다. 서철원 박사는 10월 28일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정이철 목사와 '김성로 부활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관한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의 위험성을 알리는 세미나와 기자 간담회에 논찬자로 참석하였다. 서철원 박사는 정이철 목사가 제시하는 김성로 목사
1. 영지주의 vs 이레니우스처음 2세기의 이단은 영지주의였다. 이들은 3세기에도 존재하였는데, 3세기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마니교가 매우 주요한 이단으로 떠올랐다.당시 이교에서 발생한 영지주의는 기독교 내에 들어와 종교적 혼합주의를 추구하였다. 고대의 세계는 정신적 자원이 고갈되고, 극심한 기근, 구원의 결핍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기독교가 보여주는 갱생과 감화력은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전하는 기독교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이교의 정교한 예배 의식에 친숙했던 이들은 교회의 예배가 무미건조하고 아무런 효험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그리하여 영지주의자들은 이교의 여러 종교와 기독교를 한데 결합시킴으로써 당시의 이러한 모든 형편을 타개해 보려고 하
정이철 목사는 미주 인터넷 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고, 이재위 목사는 미주 침례교 목사인 것으로 보인다. 이재위 목사의 글을 페이스북에서 페친이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이하 세이연)의 글을 링크 시킨 것에서 보았다. 이재위 목사의 글 중에 “믿음을 아무 증거를 보지 못하여도 믿어지는 것이 믿음”에 대해서 심각한 오류가 아니고 판단이 불가능한 문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순 해프닝인줄 알았는데, 바른믿음에 “미 남침례교 정이철목사 표적삼아 긴급이대위 결성”이라는 기사를 보면서 상당히 당황했다. 이 사태에 대해서 심히 우려가 크다.첫째
초대교회에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복음이 들어왔다.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행위(율법을 지킴으로)를 통해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행위구원론자' 또는 '자력구원자'들은 교회를 부패시키는 원흉이다. 이들은 가만히 들어왔고(오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않는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도 않는다.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항상 선명한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분별력을 ‘판단’ 또는 ‘비판’이라는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판단하지 못하게 하고 분별할 수 있는 기능을 마비시킨다. 분별력이 마비된 성도들에게 이들은 차츰 성경을 왜곡하여 전한다."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성도는 성령의 충만해야 한다(엡 5:18, 개역/※개역개정에서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번역했다. 영역으로는 “be filled with the Spirit”이다. 개역개정은 성도를 충만하게 하는 주체가 성령으로 이해되도록 번역했다. 이와 비슷한 형태 번역은 행 2:38이다. the gift of the Holy Ghost(KJV), ‘성령을 선물로’(개역)를 ‘성령의 선물’(개역개정)으로 개정 번역했다) 성령 충만 받는 방법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 성도 당사자의 선택이나 열정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가 성령 충만을 소유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시도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이 불가능하다.그럼에도 성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 구도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의가 진행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에 대해서 바른 사용에 대한 살핌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특히 신앙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있음으로 주의를 기우려서 사용하고 분별해야 한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참과 거짓이 분별하는 것을 독단이라고 한다. 언어 사용에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이 교회에도 도입되어 무책임하고 무분별하게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더 주의해야 한다. 한국 교회에서 분별하지 않고 많이 사용하는 한 문장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다.한국 교회 강단과 공동체 안에서 ‘기름 부으심’, ‘성령의 기름 부으심’ 혹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에 대한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어떤 연유로 “기름 부으심”이란 단어가 도입되었는
필자는 김세윤 교수의 신학을 비평했었다. 김세윤 교수는 한국 교회(장로교, 특히 여성안수를 시행하지 않는)에 대해서 비판을 했다. 그는 한국 교회의 믿음이 ‘구원파식 믿음’ 체계라고 했다. 필자는 그에 대해서 한국 교회는 구원파식 믿음을 알지 못한다고 제시했다.구원파의 믿음 체계는 자기가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으면 그 뒤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체계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믿음 체계에는 죄사함의 확신이 없고, 세상의 복을 받기 원하는 체계이다. 이런 체계는 구원파식 믿음 체계가 아니고 기복종교의 전형을 답습하는 것이다. 필자는 구원파는 기복종교의 형태가 아닌 신비주의와 방종주의라고 평가한다.그렇다면 믿음이 강하다고 평가되는 한국 교회는 어떤 형태인가? 그것은 원효대사의 가르침인 ‘일체유심조(一切唯
현대 교인은 성경적인 질서에 복종하도록 가르침 받지도 않고, 분명한 회심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으면서 마치 성령께서 주신 큰 기쁨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어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이득을 얻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 자신들의 손실은 매우 크다. 현실세계와 영적인 세계에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앙이 추상적이므로 질병, 사고, 각종의 고통의 문제 등에 직면할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이런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역사적으로 조망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또한 교리만 강조하는 것도 문제이다. 신학, 즉 교리는 기본적으로 논리학이다. 이 교리가 논리학으로만 남는다고 하면 그야말로 있으나마나한 것이다. 이 두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두
질문>이승구 교수님! 예수 그리스도는 죄 없으시나 우리와 동일한 피조된 인간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으신 후 예수님의 몸이 땅의 무덤에서 잠시 부패의 과정을 겪고 계실 때(행 13:34), 예수님의 인성의 영혼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이것에 대해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신성이 인성을 취하신 후에는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실 때 취하신 인성은 예수님의 몸과 영혼을 지칭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에서 내려져 준비된 무덤에 계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인성의 영혼은 어떻게 되었는가? 라고 사람들은 자주 묻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추론에 근거하여 답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한편 강도에게 "오늘
이상하고도 기괴한 기독교가 나온 것은 교인들의 성경적, 교리적 지적 수준을 초등학생과 같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높은 학식을 가지고 있든, 전문직에 있든지 상관없이 교인들이 교회 내에서는 모두 초등학생 정도의 신학 지식으로 무장된다. 교회에서 제공되는 수많은 프로그램도 이 정도의 수준에서 제공된다.한때 기독교 서점에서 수개월 베스트셀러였던 책들 중 청년들에게 영향력이 있었던 책이 몇 권 있었다. 많은 청년들은 그 책으로 인생의 변화를 겪었다. 필자는 그 책들을 유초등부 수련회 기간 동안 아이들에게 읽게 하였다.수련회 기간 내내 오전 시간은 모든 것을 금하고 책을 읽게 하였다. 점심 먹을 때까지 읽어야 했다. 하루에 한 권을 끝내야하기에 새벽부터 읽게 하였다. 다 읽게 되는 시간
옛날 농촌 고향 교회에 한 권찰님이 귀신이 들렸었다. 교회의 여 집사님들은 새벽마다, 매일 밤마다 힘겨운 기도의 씨름을 하고 있었다. 어느 삼일 밤 예배 후 어머니께서, "왜 청년들은 기도를 안 하느냐?"고 꾸짖으셨다. 그래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몇 안되지만 청년들을 모아 여 집사님들과 같이 둘러앉아 찬양하며 기도하고 또 귀신이 나오는 성경 말씀을 나누며 기도회를 인도하였다. 담임 전도사님은 이 기도회에 별 관심이 없으신 듯 사택으로 돌아가고 안 계셨다.귀신들린 그 권찰님은 평소에 말이 거의 없는 분이신데 기도를 시키면 놀라울 정도로 유창하게 기도를 하면서, "귀신이 자기 스스로 귀신이 나갔으니 그만 기도하라"고 간곡하게 말하였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임으로 우리는 더 힘차게 매달렸다. 나중에 이 권찰님을
- 고경태 목사20세기 초 미국 아주사에서 시작한 오순절주의는 ‘방언’을 성령받음의 표징을 주장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순절주의의 문제는 ‘계시’ 이해의 큰 틀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100여년 후 세계 교회, 한국 교회는 계시에 대해서 도대체 가닥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한 상태로 전락했다. 바른 가르침이 없으면 교회 권위도 당연히 추락한다. 교회는 바른 가르침을 해야 하며, 바른 가르침을 수호해야 한다.한국 교회 안에서 발표되는 목회프로그램의 대부분은 마치 ‘꿩 잡는 게 매’라식이다. 단지 교회 구성원의 숫자를 증가시킬 목적뿐이기 때문이다. 설교를 잘하는 목적은 교인들을 많이 모으기 위해서이고, 좋은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것도 교인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나 모으기 위한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