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후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권세를 이양하고 사십 일이 지난 뒤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다(행 1:6-11). 이 사건 이후로 이제 그 누구도 사도들과 같은 지위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부활 후 사십일 동안 경험한 일들을 그 누구도 다시 경험하지 못한다.이제는 간접적으로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다. 스데반이 환상 중에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본 것과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었지만, 그러한 일은 매우 독특한 경우였고, 다른 사도들의 직접적 경험과는 다르다. 오직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전 생애를 알고 있었으며, 직접 들은 것을 증언할 수 있었으며, 죽었다가 완전히 육체로 부활하시어 함께 계셨다는 것을 증언할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이방인을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관해 큰 토론이 일어났다. 이방인들도 유대전통을 따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유대주의자들이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들에게 큰 멍에를 씌우려고 하였다. 이방인들이 굳이 할례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바울과 베드로의 신학적인 연설이 큰 효과를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연설한 야고보에 의해 대세를 결정되었다. 야고보는 구약의 예언들을 인용하면서 그 일이 지금 성취된 것이라 결론을 내리고, 베드로, 바울과 바나바의 손을 들어주었다.그러나 배려심이 많은 야고보는 단칼에 유대주의자들을 내리치지 않았다. 유대인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몇몇 행위들, 즉, 우상에게 바진 고기를 먹는 것과 피를 먹는 것과 목매어 죽인
180년경 리용 교회를 담임했던 이레네우스 주교는 그의 저서 《이단 반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오늘날 이단을 전수하는 자들의 관점을 게시하고...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고 진실과 어긋나는지를 보이고자 한다...이 책을 읽은 자들은..,지인들이 그러한 광기와 그리스도에 대한 불경의 나락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라.”이레네우스가 이단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한 책들 중 진리복음서와 요한외경이 포함된 것은 사실이다. 4세기 이후 기독교가 공식 종교로 인정되면서 이단으로 탄핵 받은 서적의 소유는 범죄 행위로 간주되었고 그러한 서적은 불태워졌다. 이 기독교는 ‘그노시스파(영지주의)’라고 불린다. 이는 보통 “지식”이라 번역되는 그리스어 그노시스에서 유래했다. 궁극적 현실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
1. 영지주의란 무엇인가?성경을 객관적, 지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포기했을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신비주의적 신앙이다. 이런 신앙을 ‘영지주의’로 볼 수 있다. 영지주의는 모든 이단들 중 가장 먼저 등장한 이단이며, 핵심적이고 모든 이단들의 자양분의 역할을 한다.영지주의는 타락한 인간의 본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사에서 뿐 아니라 신약 성경, 심지어 구약 성경에서도 영지주의는 등장한다. 영지주의는 신약 성경에 직접 언급되어 있으며 교회사가 형성되는 초창기에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가장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 이단이다. 이런 뿌리를 가진 영지주의는 인류 역사에 사라진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지금도 각 나라와 교회마다 영지주의에 영향 받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영지주
대 그레고리로부터 샤를마뉴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방 교회는 신학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신학적으로 유력했던 지방은 회교도들에게 정복을 당하였으며, 강력한 희랍 철학은 동방 민족의 세력에 밀려나게 되었다.이제 신학은 교리적 배경이 없는 북쪽 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신학이란 단지 과거의 유산 정도로만 여겨지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샤를마뉴는 국가뿐 아니라 교회도 지배하였다. 교회의 예배, 훈련뿐만 아니라 교리 문제 등까지 간섭하였다. 그의 판단은 실천적인 것, 실용적인 것이냐?가 기준이 되었다.신학적 암흑의 시대에 교회는 어느새 반펠라기안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신학의 중요성을 모르고, 실천적인 것, 실용적인 것을 강조하는 환경은 반펠라기안이 성장하는 좋은 토양이다. 반펠라기안 저술은 중
화란의 코르넬리스 프롱크 목사를 초청하여 도르트 신조 강해 세미나를 개회한다.자세한 내용은 아래과 같다.
1. 영지주의 vs 이레니우스처음 2세기의 이단은 영지주의였다. 이들은 3세기에도 존재하였는데, 3세기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마니교가 매우 주요한 이단으로 떠올랐다.당시 이교에서 발생한 영지주의는 기독교 내에 들어와 종교적 혼합주의를 추구하였다. 고대의 세계는 정신적 자원이 고갈되고, 극심한 기근, 구원의 결핍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기독교가 보여주는 갱생과 감화력은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전하는 기독교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이교의 정교한 예배 의식에 친숙했던 이들은 교회의 예배가 무미건조하고 아무런 효험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그리하여 영지주의자들은 이교의 여러 종교와 기독교를 한데 결합시킴으로써 당시의 이러한 모든 형편을 타개해 보려고 하
초대교회에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복음이 들어왔다.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행위(율법을 지킴으로)를 통해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행위구원론자' 또는 '자력구원자'들은 교회를 부패시키는 원흉이다. 이들은 가만히 들어왔고(오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않는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도 않는다.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항상 선명한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분별력을 ‘판단’ 또는 ‘비판’이라는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판단하지 못하게 하고 분별할 수 있는 기능을 마비시킨다. 분별력이 마비된 성도들에게 이들은 차츰 성경을 왜곡하여 전한다."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현대 교인은 성경적인 질서에 복종하도록 가르침 받지도 않고, 분명한 회심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으면서 마치 성령께서 주신 큰 기쁨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어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이득을 얻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 자신들의 손실은 매우 크다. 현실세계와 영적인 세계에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앙이 추상적이므로 질병, 사고, 각종의 고통의 문제 등에 직면할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이런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역사적으로 조망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또한 교리만 강조하는 것도 문제이다. 신학, 즉 교리는 기본적으로 논리학이다. 이 교리가 논리학으로만 남는다고 하면 그야말로 있으나마나한 것이다. 이 두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두
이상하고도 기괴한 기독교가 나온 것은 교인들의 성경적, 교리적 지적 수준을 초등학생과 같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높은 학식을 가지고 있든, 전문직에 있든지 상관없이 교인들이 교회 내에서는 모두 초등학생 정도의 신학 지식으로 무장된다. 교회에서 제공되는 수많은 프로그램도 이 정도의 수준에서 제공된다.한때 기독교 서점에서 수개월 베스트셀러였던 책들 중 청년들에게 영향력이 있었던 책이 몇 권 있었다. 많은 청년들은 그 책으로 인생의 변화를 겪었다. 필자는 그 책들을 유초등부 수련회 기간 동안 아이들에게 읽게 하였다.수련회 기간 내내 오전 시간은 모든 것을 금하고 책을 읽게 하였다. 점심 먹을 때까지 읽어야 했다. 하루에 한 권을 끝내야하기에 새벽부터 읽게 하였다. 다 읽게 되는 시간
교리가 어떤 것인지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교리가 없는 곳의 모습을 살펴보겠다. 성경적 신학과 교리가 빠진 곳에서 무엇이 설교되고 있는가? 인간 중심, 나의 잘됨이 설교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군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들려주는 설교가 판을 치게 된다."나는 성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고단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정죄하는 설교를 하면 절망입니다 ... 신앙에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소망이 넘치는 삶의 태도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분명한 사명을 바탕으로 일관성 있게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왔습니다.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꿈을 꾸고,
예수님의 동생 유다는 아주 다급하게 편지를 쓴다."...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 1:3)상황이 긴박했으므로 간단한 인사 이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1:4)평화로운 초대교회에 이단들이 침투한 것이다. 이들도 역시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라고 속였다."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 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플라톤은 에서 인간이 일생 동안 지하 동굴에 묶여 있어 어둠밖에 모른다고 상상한다. 사람들은 벽에 나타난 그림자들이 현실이라고 믿는다. 만일 한 죄수가 동굴에서 풀려나와 햇빛 아래로 나온다면 엄청난 고통에 시달릴 거라 한다. 그는 강렬한 빛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그저 익숙한 어둠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의 눈은 결국 빛에 적응한다. 그는 현실의 광대함, 혼란에 직면한다.그러나 그는 동굴로 돌아가면 경멸당한다. 그는 예전과 달리 어둠 속에서 보지 못한다. 동굴 속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고, 그처럼 장님이 되지 않기 위해 햇빛을 보지 않기로 다짐한다. 플라톤은 환락의 힘, 정신을 혼란시키는 감각의 힘, 이성을 말살하는 감정의 힘을 두려워했다. 개화된 자들이나 엘리트 계급이 동굴 벽에 비
90년대 후반 서점의 한쪽 구석에서 1984년 3판 발행된 로이드 존스의 산상설교집 下권을 집어 들었다. 책은 누렇게 되어 있었으며 먼지는 푹 쌓여 있었다. 사랑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온다고 하더니, 이 낡은 책은 예상치도 못하게 마틴 로이드 존스와의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하였다.그때부터 몇 년에 걸쳐 로이드 존스의 책의 대부분을 모았으며 밤낮으로 읽었다. 로이드 존스로부터 시작된 영적 탐험은 시간을 거슬러 계속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등을 만나며 아마존과 같은 드넓은 강가에서 한동안 절망과 소망, 두려움과 기쁨을 오가며 머물렀다.그들을 따라 오르자 이제 더 좁아진 칼빈을 만났고, 그 깊이에 무릎을 꿇었다. 도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그의 통찰력과 성경 앞에서의 진지함은 성경을
교인 중에 어느 분께서 '어느 목사님'의 설교가 어떤지 좀 평가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들어보니 '율법폐기론'의 전형적인 패턴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간략하고 쉽게 율법폐기와 청교도 개혁주의의 차이를 구별해 드렸습니다. 이 글은 제게 질문하신뿐 아니라, 우리 교인들이 같이 공유해야할 것 같아 올립니다. 율법과 복음 사이의 구분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 유명한 믿음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율법과 복음을 구분하는 비결을 잘 아는 사람은 누구든 우두머리가 되고 성경 박사로 불릴 것이다”(마틴 루터)“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무지는 기독교를 부패시켰고, 여전히 부패시키고 있는 오용의 핵심이다”(테오도루스 베자)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개혁주의 목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숙제 중 하나가 개혁신앙과 교리체계를 평신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현대의 교회는 감정적인 것을 참된 신앙으로 둔갑시켜 조금이라도 어려운 이론과 체계에 관심을 기울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이성적인 것을 참된 신앙(?)을 방해하는 것쯤으로 치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비해 개혁신앙은 차분히 이론을 공부해야 하며, 그 양 또한 방대하고 깊기 때문에 감각적인 현대교인들에게 이 좋은 것을 전달할 도구가 마땅치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모처럼 개혁주의 노선에 들어선 사역자들은 방대한 개혁신학 책과 청교도 책을 보며 그것을 충분히 소화하기는커녕 읽기 조차 힘겹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정이철 목사의 는 참으로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여러 단체에서 세족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백석대(총장 최갑종) 교수들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행사를 하며 제자를 섬기는 마음과 사랑을 전하는 마음으로 세족식을 거행했습니다. 명지대(총장 유병진)또한 세족식의 행사는 지난 31일 거행하였습니다. 명지대의 세족식은 15년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4월 2일에 로마 레비비아 교도소로 찾아가 재소자의 발을 씻기고 그들의 발등에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한 여성 재소자는 여기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고 합니다.이들의 공통점은 위에 있는 자가 낮은 자를 향해 낮아지는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는 세족식의 의미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세족식의 의미일까요? 요한복음 12장은 예수님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므로 조금이라도 깨어서 자기를 살피지 아니하면 신속히 세속적이요, 사탄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목적이 옳으면 그 수단과 방법이 옳은 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목적이 옳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상이 복음전도의 현장에서 빈번히 나타납니다. 이는 치명적이기에 그 결과는 항상 옳지 않는 방법으로 결론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기독교는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것만이 아니라, 그 정상을 가기 위한 좁은 문, 좁은 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즉 기독교란 과정조차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중에 오늘 눈여겨볼 것은 첫 번째 시험입니다.“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313년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핍박받았던 기독교를 지켜온 변증가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오리겐(Origen), 라틴교회의 터툴리안(Tertullian)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들의 변증사역은 네로의 박해(64년)로부터 거의 300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이방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오해는 크게 다음의 세 가지였습니다.첫째, 황제의 권위와 국가 질서를 파괴하는 불순한 시민들이라는 오해,둘째, 그리스도인 형제와 자매들이 서로를 위하고 봉사하는 것을 그들끼리 먹고 마시며, 극도로 문란한 파티를 즐기며, 어둠 속에서 근친상간까지도 이루어진다는 오해,셋째, 기독교인들이 아기 예수라고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