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는 교회에서 유일한 직분이다. 예수께서 직접 세운 특별임시 직분(the extraordinary office)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도’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하고, 추구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성경에 근거한 '사도'는' 계시 담지자(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고 '교회 설립의 원형'이다. 교회 설립의 방식과 내용(복음, 바른 교훈)을 사도가 결정했다.사도 요한이 소천된 뒤에 사도의 후계자들을 ‘속사도(續使徒, Post-Apostolic, 100-200)’라고 부른다. 성경에 등장한 마가, 실라, 디도, 디모데 등은 계시 담지자이기도 하고, 사도의 직계 제자이기도 하다. 96년경에 로마의 클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문서가 있지만, 성경이 아닌 속사도 문헌으로 구분한다. 사도
인간의 탐욕이 영적 진보와 훈련에 추가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기도는 대표적인 영적 훈련이다. 영적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순수해야 한다. 인간적인 수단을 첨가시키는 것은 육적이고 영적이지 않다. 육적인 수단의 대표는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은 말과 외형은 매우 경건하지만, 내면은 불신으로 가득 차있어 하나님 앞에 악하고 게으른 유형이다.거룩한 기도에 인간의 탐욕이 침투했는데, 그것은 ‘많은 시간의 기도’를 원하는 것이다. 많은 시간의 기도를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인지하지 않는 인간의 독단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많은 시간을 기도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거룩하고 정결하라고 명령하신다.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그리스도인도 ‘많은 기도 시간’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에 명시적으로 ‘많은 말’이 기도 응답과 관계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를 ‘중언부언’이라고 제시했다.이방인이 하는 ‘중언부언’(do not keep on babbling like pagans. NIV)에는 ‘기도’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헬라어 ‘βατταλογήσητε’는 1회 등장하는 단어로, KJV는 ‘반복(repetition)’으로 제시했고, NIV는 ‘옹알이(babbling)’로 제시했다. 우리는 쉽게 ‘반복’하는 행동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NIV에서 ‘옹알이’라는 개념으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2:1)그리스도인이 형제와 이웃, 그리고 교회와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행위가 ‘중보기도’는 아니다. 기독교에서 ‘중보(仲保, mediation)’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신 ‘중보자(仲保者, the Mediator)’,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천상 통치에 적용하는 유일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이웃을 위한 기도를 ‘도고(禱告, intercession)’라고 했다. ‘도고’라는 단어는 중국어를 차용한 단어이다. ‘중보’라는 단어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1970년대 미국 신사도 운동가 피터 와그너의 ‘intercession’을 한국 교회가 ‘중보기도’로 정착해서 사용하는 단어이다. ‘중보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는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형성되었다. 오순절주의는 1세기 예루살렘 오순절(사도행전 2장)에 임한 성령의 한 현상인 ‘방언’을 성령 세례의 표로 주장하는 신학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은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하는 기능을 했는데, 오순절주의에서는 방언을 개인적인 ‘성령세례의 증표’로 세웠다. 방언은 오순절주의의 기본이고 다른 복음주의 교회와 구분할 수 있는 표식이다. 성도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오순절주의는 방언을 추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성령세례와 방언에서 오순절주의는 ‘방언’ 사모를 추구한다. 방언이 임하지 않으면 성령세례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1898년 칸사스의 토페카(Topeka)에서 감리교 목사 챨스 파함(Charles Parham.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묻는 제자들을 향해서 답하지 않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말씀했다."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18)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이해하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제자들(교회)이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를 증인하게 될 것이다. 1) 권능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권능을 받는 것이다. 2) 권능을 받아 행하는 것은 예수를 증인하는 것이다.‘증인’을 ‘증거’, ‘증언’으로 이해한다. ‘증인’은 ‘마르투스’인데 ‘순교자’로 의미가 전이 되었다. 예수를 증인(마르투스)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10월 28일(금)에 정이철 목사가 김성로 목사의 사상이 부활주의라는 것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것을 인터넷신문 기독교포탈뉴스(http://www.kportalnews.co.kr/)이 “김성로 목사, 기독교 복음의 핵심 파괴한다”로 게재했다. 그리고 첨가해서 “김성로 목사의 '십자가 폄훼'와 '하늘 제사' 주장 녹취록”도 보도했다. 이에 대해서 김성로 목사 측에서 반론보도를 제시했다. 제목은 “[반론]춘천 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의 입장”이고, 부제(“'이중 제사' 악의적 표현... "영원한 제사는 십자가에서 드렸다"”)는 비판의 요지인 두 사상에 대해서 부정과 수정하는 것이다.1>김성로 목사의 글을 보면서 먼저 안타까운 심정이 있다. 인터넷 신문 대표 정이철 목사와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대표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는 2016년 10월 1일(토)에 총신대학교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회장 김용국) 35차 학술대회에서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 제목에 나오는 “해독문”은 독소를 해독(解毒)하는 글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2016.10.2.)는 위 논문발표 내용을 “새 관점학파 칭의론, 로마가톨릭과 뭐가 다른가”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 기사 제목은 최덕성의 논문과 ‘새 관점학파의 칭의론’를 대립시킨다. 그러나 논문은 김세윤 신학이나 새 관점학파의 신학의 칭의론을 가볍게 언급하고 있다. 언론보도문은 최덕성의 논문이 현재 한국 신학계에 가장 뜨거운 이슈에 대한 명료한 이해와 길을 제시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정이철 목사는 미주 인터넷 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고, 이재위 목사는 미주 침례교 목사인 것으로 보인다. 이재위 목사의 글을 페이스북에서 페친이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이하 세이연)의 글을 링크 시킨 것에서 보았다. 이재위 목사의 글 중에 “믿음을 아무 증거를 보지 못하여도 믿어지는 것이 믿음”에 대해서 심각한 오류가 아니고 판단이 불가능한 문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순 해프닝인줄 알았는데, 바른믿음에 “미 남침례교 정이철목사 표적삼아 긴급이대위 결성”이라는 기사를 보면서 상당히 당황했다. 이 사태에 대해서 심히 우려가 크다.첫째
성도는 성령의 충만해야 한다(엡 5:18, 개역/※개역개정에서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번역했다. 영역으로는 “be filled with the Spirit”이다. 개역개정은 성도를 충만하게 하는 주체가 성령으로 이해되도록 번역했다. 이와 비슷한 형태 번역은 행 2:38이다. the gift of the Holy Ghost(KJV), ‘성령을 선물로’(개역)를 ‘성령의 선물’(개역개정)으로 개정 번역했다) 성령 충만 받는 방법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 성도 당사자의 선택이나 열정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가 성령 충만을 소유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시도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이 불가능하다.그럼에도 성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 구도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의가 진행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에 대해서 바른 사용에 대한 살핌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특히 신앙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있음으로 주의를 기우려서 사용하고 분별해야 한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참과 거짓이 분별하는 것을 독단이라고 한다. 언어 사용에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이 교회에도 도입되어 무책임하고 무분별하게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더 주의해야 한다. 한국 교회에서 분별하지 않고 많이 사용하는 한 문장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다.한국 교회 강단과 공동체 안에서 ‘기름 부으심’, ‘성령의 기름 부으심’ 혹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에 대한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어떤 연유로 “기름 부으심”이란 단어가 도입되었는
필자는 김세윤 교수의 신학을 비평했었다. 김세윤 교수는 한국 교회(장로교, 특히 여성안수를 시행하지 않는)에 대해서 비판을 했다. 그는 한국 교회의 믿음이 ‘구원파식 믿음’ 체계라고 했다. 필자는 그에 대해서 한국 교회는 구원파식 믿음을 알지 못한다고 제시했다.구원파의 믿음 체계는 자기가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으면 그 뒤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체계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믿음 체계에는 죄사함의 확신이 없고, 세상의 복을 받기 원하는 체계이다. 이런 체계는 구원파식 믿음 체계가 아니고 기복종교의 전형을 답습하는 것이다. 필자는 구원파는 기복종교의 형태가 아닌 신비주의와 방종주의라고 평가한다.그렇다면 믿음이 강하다고 평가되는 한국 교회는 어떤 형태인가? 그것은 원효대사의 가르침인 ‘일체유심조(一切唯
존 파이퍼가 톰 라이트의 견해에 대한 변호의 책 제목이 (신호섭 역, 부흥과개혁사)이었다. 톰 라이트의 저술은 (에클레시아북스)에 근거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승구 교수와 박영돈 교수가 변론서를 펴냈다. 그럼에도 새관점학파의 기세를 잡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 김세윤 교수도 (두란노, 2002)이라는 저술로 대응했지만, 결국 새관점 학파의 흐름을 막지 못하고 굴복된 듯하다.최갑종 교수는 김세윤 교수를 지지하면서 ‘새관점’을 기준하여 ‘옛관점’이라고 했다. 옛관점과 새관점은 유대교(율법주의/언약적 신율주의)에 대한 이해, 다메섹 체험(회심과 소명/소명)에 대한 이해 등에서 결정적 차이가 있다. 당연히 예수의 지위에 대한 이해도 다르다. 우리에게 익숙한
"정이철 목사와 임헌원 목사는 특별계시를 오직 성경 외에는 없다고 모두 부정한다. 물론 정이철 목사에 국한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경 외에는 계시가 더 이상 없다”고 말한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조직신학적 의미는 다르다.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많은 조직신학자들이 이단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특별계시라는 용어도 조직신학자들과 전혀 다르다. 필자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지만, 객관적인 특별계시는 성경이 유일하며, 성경으로 그 사실성과 진리적 기준이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신을 계시하는 방법은 지금도 존재한다는 뜻이며, 그러한 계시를 성경과 다른 계시의 방법으로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는 주장을 말한 적이 없다. 오직 성경만이 객관적인 진
- 고경태 목사20세기 초 미국 아주사에서 시작한 오순절주의는 ‘방언’을 성령받음의 표징을 주장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순절주의의 문제는 ‘계시’ 이해의 큰 틀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100여년 후 세계 교회, 한국 교회는 계시에 대해서 도대체 가닥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한 상태로 전락했다. 바른 가르침이 없으면 교회 권위도 당연히 추락한다. 교회는 바른 가르침을 해야 하며, 바른 가르침을 수호해야 한다.한국 교회 안에서 발표되는 목회프로그램의 대부분은 마치 ‘꿩 잡는 게 매’라식이다. 단지 교회 구성원의 숫자를 증가시킬 목적뿐이기 때문이다. 설교를 잘하는 목적은 교인들을 많이 모으기 위해서이고, 좋은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것도 교인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나 모으기 위한 방
김세윤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드리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라고 정의했다(159쪽). 앞에서는 ‘깨닫는 것’이라고 제시했다(149쪽). ‘받아드리는 것’과 ‘깨닫는 것’은 동의어이고, 인간의 전적 자기능력이다. 깨달아야만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을 유입(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세윤에게 ‘복음은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과 부활’인데, ‘이 내용’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불트만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159쪽).그리스도의 대신적/대표적 죽음을 받아드리는 것, 내포된 안에서 연합이 실제로 발생한 것이다(159쪽, 참고, 김세윤, [구원이란 무엇인가?], 두란노, 63-69). 김세윤은 복음을 받아드린 사람은 “예수가 주이시다”고 고백한다고 한다(160쪽). 필자는 서철원 박사는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김세윤은 고린도전서에서 ‘의’(義, 1:30)라는 단어, 세례 때 의인으로 칭함 받음(6:11), 율법에 대한 부정이 두 번 등장한 것(9:19-23, 15:33-57)으로 제시했다(148쪽). 그리고 고린도후서에서 칭의론에 대한 가르침이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고 했다(148쪽). 모세를 통해서 준 옛 율법의 언약과 그리스도를 통해 준 새언약을 성령의 사역이 의를 주는 사역이라고 했다(148쪽).김세윤은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가 모두의 대표/대신 죽은 것과 죄를 위한 속죄제사로 의인이 되는 사건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하나님 나라)로 회복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149쪽).김세윤은 칭의 이해에서 바울 상태를 모범으로 제시한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음
한국 교회에 톰 라이트의 저술은 거의 다 번역되었다. IVP에서 많이 번역하였고, 몇 출판사에서 톰 라이트 저술을 번역했다. 김세윤의 저술은 기존에 저술들까지 모두 두란노에서 출판하고 있다. 과거에 발표했던 에세이들도 모두 묶어 책으로 출판했다. 김세윤과 톰 라이트의 책은 한국 교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이유는 독자들이 저자의 신학 전개가 사변적이지 않고 실제적으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톰 라이트의 저술은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있을 정도다. 많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전개하는 톰 라이트의 전개 방식은 기존의 신학 전개 방식과 전혀 다르게 때문에 신선하고 즐거울 수 있다. 그래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을 읽는 독자는 미로로 들어가는 입문서를 만난 것이다. 톰 라이트에서
현재 한굮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말할 때 ‘죽음(십자가)와 부활’이라고 단순하게 규정하는 모습을 본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총제이다. 카알 발트는 은혜의 선택을 복음의 총화라고 했다 (CD., II/2, 3ff). 복음은 죄사함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이다. 성자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 경륜(pactum salutis)를 이루는 중보자로서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시며 중보하시며 마지막 날에 심판하시고 영원한 중보자로서 택자에게 영원한 경배와 찬양을 받으신다.‘오순절’을 강조하며 체계화한 것이 오순절주의이다. 오순절주의는 성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종교체험에서 시작해서 사도행전 2장 등에서 등장하는 방언을 붙여서 체계화했다. 자기 경험이 성경에 기록되
신학자들은 신학을 진행할 때 반드시 개념화, 신학화한 단어를 사용한다. 김세윤도 가르치는 선생이기 때문에 개념화가 나름 되어 있다. 그 개념을 잘 이해하면서 자기 개념을 확립하는 것이 학도의 자세이다. 반면 서철원 박사도 선생이기 때문에 개념화가 되어 있다. 서양 신학자자들의 개념은 잘 이해하기 어렵지만 한국 신학자들의 개념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서철원 박사나 김세윤의 신학 개념도 저술과 강연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비교할 수 있다. 전편에서는 두 신학자의 신학 여정에 대해서 비교했고, 이번에는 두 신학자의 ‘의(義)’ 개념에 대해 제시하려고 한다.첫째, 서철원 박사는 ‘의(義)’를 ‘하나님 앞에서 생존권’이라고 한다. 김세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라고 한다. 칭